한줄 詩

감긴 눈이 더 감기려 할 때 - 서규정

마루안 2018. 4. 10. 22:17

 

 

감긴 눈이 더 감기려 할 때 - 서규정


이 봄날에 터지는 건 꽃망울뿐인데
남의 집에 들어가 눈뜨고 낮잠 자는 주인에게 놀라
그 자리에서 졸도한 좀도둑 같은, 뜬눈이 지키는 세월이다
목련화야 내 생애 단 한번만이라도
그대 발밑에 잠들고 싶어
남들이 다 쓰레기로 버린 사랑이라는 말
꽃잎으로 베고 누워 꿈결처럼 뒹굴래
허공이 왜 또 허공인지
말이 가 닿아야 할 하늘이 낮달로 뒤집어지고
길은 길 위에서 잘려 막 바로 절벽을 이루고
말은 말 끝에서 잘려 뜬금없는 새소리로 차올라서
천지간에 남은 것은 이제 빛뿐이라서
얼마나 간이 커야 좀도둑이 되는 것이냐
길거리에서 손을 덜덜 떨며 훔친 것은
그대 어깨 위에 떨어진 머리칼 한 올
풀린 머릿결이 선율처럼 천상으로 가는 도중이, 아마 공중이었지
바람이 분다, 한 바퀴만 더 돌고 갈래


*시집, 다다, 산지니

 

 

 

 



낙화 - 서규정


만개한 벚꽃 한 송이를 오 분만 바라보다 죽어도
헛것을 산 것은 아니라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모심이 있었고

추억과 미래라는 느낌 사이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도 너무 가뿐한




*시인의 말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도 살고 싶다는 삶의 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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