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 부고 - 황학주

마루안 2018. 4. 10. 20:48



봄날 부고 - 황학주



손으로 전화기를 감싸 쥐자 허리가 구부정해진다
얼굴이 비뚜름하게 옆으로 돌아가고
밭은기침도 얼른 그때 나온다
이 자세로 밀어낼 수 없는 기별을 받아두는 것인가
마당 끝자락으로 가 전화기 안쪽을 붙들고 있다
귀 달린 옹배기 비 맞으며 함께 듣고 있다
나는 기침을 하며 맨손에 붉은 새소리 같은 걸 뱉는다


거기에도 사방팔방이 있다면
꼭 길한 향(向)을 찾으시게
서로 어울리지 못한 한쪽 다리는 고쳐 달고 주유해야 될 게야
문득 귀에 익은 벨소리 울리고 복사꽃 비 맞는 오늘 같은 날
내 죽음을 전해 들은 듯 내 마당에 꽃 진다
자넨 내 죽음을 찾아오지 않아도 되니
하, 좋겠군 좋겠어, 더구나 봄비라니


코끼리 엄니에 스쳐 몇 바늘 꿰맨 머리 뒤쪽을 살펴주듯
빗방울이 빈 의자에 닿아 부드럽게 튀어 오른다
죽음도 우리에게 와서 그렇게 한 번 찬찬히 튕겨지는 것일까
우리를 그저 깜짝 한 번 더 깨우려는 듯
부고를 돌리는 전화가 오면 죽음은
지랄 같겠다, 할 일이 더 없으리
사랑을 영원히 가지는 내 신작 죽음 같은 걸 생각하며
비에 젖은 꽃잎을 따 주는 봄날이었다



*시집, 노랑꼬리 연, 서정시학








능가사 벚꽃 잎 - 황학주



어둠 속에서 여인을 본 날이었다
놀랍게도
이불을 끌어안은 것처럼
빗소리를 바짝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낮술에 취해 비스듬히 베어진 남자가
물 묻은 가지를 짚은 채 여인 옆에 기대앉아 있었다
여인과 잠깐 눈이 마주친 동안
산벚꽃 잎이 날아왔다


빗소리 깔린 길
멀리 데려간 단 한 발자국만큼의 인연을
생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같다 이미 울다 간 바 있는
봄, 사랑이 결정되기라도 하면
숙명이 책상다리를 하고 노랑 병아리 같은 것을 깔고 앉는


그런 전철이 있는 것 같다
서서히 기울며 지워지는
어둠은 그날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잎도 져 내리었다
한참 후
양쪽 발소리가 다른 여인이
입구 쪽으로 천천히 나가고 있었다


젖은 꽃잎이 날아 내리며 입구를 간신히 비추어 주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긴 눈이 더 감기려 할 때 - 서규정  (0) 2018.04.10
불행한 서정시 - 김병심  (0) 2018.04.10
꽃잎이 지는 건 - 이남일  (0) 2018.04.10
한 생애가 적막해서 - 허형만  (0) 2018.04.09
숨은 딸 - 오탁번  (0) 2018.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