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 정소슬
-좌우
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너였을 수도 있었을 때
대부분 하등동물이
등과 배가 달라
색깔 구분이 확연하여
뒤집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의 정체 금세 탄로 나
먹이가 되기 십상인
먹힐 땐 등과 배를 구분하지 않는
위아래 구분도 않는
좌우 구분은 더더욱 않는
너였을 수도 있었을 내가
기꺼이 내가 되었다는 건
반쪽의 너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을까
*시집, 사타구니가 가렵다, 도서출판 푸른고래
어제 내린 꽃비 - 정소슬
어제 내린 꽃비
한나절 덩싯덩싯 꽃춤 추어대더니
땅속으로 다 스며들고
강물에 다 떠내려가고
진창에 고인 물로만 희붉게 남았습니다
어제 그 꽃비의 흔적은 오로지 저 진창뿐입니다
저 진창만이 어제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영화를 증거해야 할 진창엔
어느새 잠자리가 알을 낳아 유충들로 득실댑니다
뾰족한 식성을 앞세워
저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동족상잔의 아수라장입니다
하루 사이 꽃비의 추억은 까마득합니다
저급한 바람으로 변절했습니다
너덜너덜
저질의 장신구가 되었습니다
# 정소슬 시인은 1957년 울산 출생으로 본명은 정정길이다. 2004년 <주변인과 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속에 너를 가두고>, <사타구니가 가렵다>, <걸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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