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 정소슬

마루안 2018. 3. 27. 21:11

 

 

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 정소슬

-좌우

 

 

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너였을 수도 있었을 때

 

대부분 하등동물이

등과 배가 달라

색깔 구분이 확연하여

뒤집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의 정체 금세 탄로 나

먹이가 되기 십상인

먹힐 땐 등과 배를 구분하지 않는

위아래 구분도 않는

좌우 구분은 더더욱 않는

 

너였을 수도 있었을 내가

기꺼이 내가 되었다는 건

반쪽의 너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을까

 

 

*시집, 사타구니가 가렵다, 도서출판 푸른고래

 

 

 

 

 

 

어제 내린 꽃비 - 정소슬

 

 

어제 내린 꽃비

한나절 덩싯덩싯 꽃춤 추어대더니

땅속으로 다 스며들고

강물에 다 떠내려가고

진창에 고인 물로만 희붉게 남았습니다

어제 그 꽃비의 흔적은 오로지 저 진창뿐입니다

저 진창만이 어제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영화를 증거해야 할 진창엔

어느새 잠자리가 알을 낳아 유충들로 득실댑니다

뾰족한 식성을 앞세워

저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동족상잔의 아수라장입니다

하루 사이 꽃비의 추억은 까마득합니다

저급한 바람으로 변절했습니다

너덜너덜

저질의 장신구가 되었습니다

 

 

 

 

# 정소슬 시인은 1957년 울산 출생으로 본명은 정정길이다.  2004년 <주변인과 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속에 너를 가두고>, <사타구니가 가렵다>, <걸레>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흰머리 - 하상만  (0) 2018.03.28
혁명에 관한 명상 - 전윤호  (0) 2018.03.28
망둥이가 살아 있다 - 이봉환  (0) 2018.03.27
히포구라테스 선서 - 김연종  (0) 2018.03.27
무허가 이발소 - 강세환  (0) 2018.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