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혼자 밥을 먹는 저녁 - 권현형

마루안 2018. 3. 27. 18:56



혼자 밥을 먹는 저녁 - 권현형



기차가 남쪽으로 몸을 틀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머무는 역마다 낯설다
혼자 김밥을 먹는 저녁
휙휙 지나가는 기차의 속도와 상관없이
목울대를 넘어 음식물은 느릿느릿 흘러가고
혼자 여행은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에 간극을 만든다
간격을 떼어 놓는다
가장 멀리 놓이는 것은 나 자신
먼 곳에 놓여 창 밖 눈발을 바라보다
혼자 떠나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나를 누가 기억하고 증명해 줄 것인가
눈발이 창에 부딪히며 만든 수액 위에
지문을 남겨본다, 첫눈의 데칼코마니
눈앞으로 몰려오는 흰 흰 흰
나비떼, 누가 저 빙의의 날갯짓을
따뜻했던 살점 하나를 기억할 것인가



*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천년의시작








밥이나 먹자, 꽃아 - 권현형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부음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뒤적거리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던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번도 밥을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 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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