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조용한 저녁 - 안태현

마루안 2018. 3. 13. 20:02



조용한 저녁 - 안태현



이 무거움은
지구의 반대편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대양과 대륙을 건너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표정으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하루살이 같은 저녁을 먹고
문득 나를 내려놓을 때
나의 무거움은 나의 살붙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저녁에는 오로지 조용히 앉아
내압을 확인할 뿐이다
수많은 발자국과 어지럽게 얽힌 길들
시공을 넘나드는 관계들의 날갯짓이 빠르고 힘차서
이 지구의 반대편 누구라도
심호흡을 하고 있으리라
담수보다 누수가 더 무거운 일
종일 몇 됫박의 구름 같은 시간을 가슴에 채워 넣으며
창공을 차고 오르는 새가 되고 싶었으나
조용한 저녁에 오는 시간의 누수는
홑겹의 영혼을 불러온다
쩍쩍 갈라진 틈으로 불칼 같은 뜨거움을 들이댄다
무거운 내 편으로 지구가 기울고 있다



*시집, 이달의 신간, 문학의전당








바닷가 장례식 - 안태현



바닷가 허허벌판
조등 하나 걸리지 않은 상가(喪家)에서 맞는 저녁입니다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걸음을 멈춘
이승의 마지막 발자국을 감추고 싶다는 듯이
함박눈은 내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 두고 온 것들이 많은
저마다의 마음들은
먼 바다 건너 불빛을 좇아 뭍으로만 흘러갑니다
뱃길이 끊어질까
깊어가는 걱정에 눈발이 멈칫하기도 하지만
주먹밥 한 덩이
뜨끈한 파랫국 한 사발에 속을 데우며
몸이거나 영혼이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합니다
어둠이 드리운 바닷가를
물새처럼 거닐며
살아갈 날의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없지는 않으나
크고 작은 근심들은
왜 아무 때나 날아오르는지
이 저녁 분분한 눈발 같기만 합니다
어둠의 깊은 골 속으로
망자의 마지막 발자국 소리가 스치듯 사라집니다
채취선 한 척 출렁거리는
검은 물빛 너머
나이거나 당신인 곡(哭)소리가 들려옵니다






# 안태현 시인은 전남 함평 출생으로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했다. 2011년 계간 <시안>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교원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 <산림문화작품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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