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쓸한 날에 - 강윤후

마루안 2018. 3. 13. 19:47

 

 

쓸쓸한 날에 -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타전하는 것 같기에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문학과지성

 

 

 

 

 


다시 쓸쓸한 날에 - 강윤후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란하다. 무책임하게
행복을 쏟아내는 라디오의 수다에 나는
눈이 부셔 금세 어두워지고 하릴없이
화분에 물이나 준다. 웬 벌레가 이렇게 많을까.
살충제라도 뿌려야겠어요, 어머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은 오전 열시에 행복하므로
엽서로 전화로 그 행복을 라디오에 낱낱이 고해바치므로
등허리가 휜 어머니마저 귀를 뺏겨 즐거우시고
나는 버리지 않고 처박아둔 해진 구두를 꺼내
햇살 자글대는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공연히
묵은 먼지나 턴다. 생각해보면 그대 잊는 일
담배 끊기보다 쉬울지 모르고
쑥뜸 떠 독기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
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약칠까지 하여 정성스레 광 낸 구두를 신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피노키오처럼 걸어본다.
탈수기에서 들어낸 빨랫감 하나하나
훌훌 털어 건조대에 널던 어머니
콧노래 흥얼대며 마당을 서성거리는 나를
일손 놓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시고
슬며시 짜증이 난 나는 냉큼
구두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쿵쾅거리며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가 커피 물을 끓이며 나는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얘야,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 젖은 걸레로 화분을 닦으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살아갈 날들을 내다본다. 그래, 정녕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그리하여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에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대쪽처럼 쪼개지리라.

 

 

 

 

# 강윤후 시인은 1962년 서울 출생으로 본명은 강헌국이다.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현대문학>에 동생 이름인 강윤후라는 필명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인 <다시 쓸쓸한 날에>가 유일한 시집이다. 현재 모교인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집에 실린 자서에 눈길이 간다.

 

*자서

 

문득 시인이 되어 여기까지 떠내려왔다.
앞으로 얼마를 더 흘러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다만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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