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목장을 꿈꾸며 - 서상만

마루안 2018. 3. 13. 19:30



수목장을 꿈꾸며 - 서상만



영혼이라도 떠돌지 않고 안주하려면
실은 수목장이 좋아 보이네, 그것도
손 안 타는 준령에 걸터앉아 좀 못생겨도
향 깊은 소나무 그늘이면 어떨는지


훨훨 허공 닦는 일도 편할 거고
이 세상, 소란 떠는 잡새소리 멀고
잘못 산 인생, 들통 날 염려 없는
저녁노을 낭자하게 묻힐 곳 더욱 좋지


역광에 눈 비비며 멀리 뻐꾸기 울음 듣는
혹 분월포에서 대동배 가는 돌산마루
북새구름 물고 앉은 칡넝쿨 사이
창천 뚫린 갈매기 여인숙 같은 곳, 좋지


그 생각도 못하고 남한강 묘역,
먼저 간 아내 옆자리를 고요로 비웠네
명당 같은 말 다 실없는 소리
떠나는 자는 말이 없으니



*시집, 적소謫所, 서정시학








홑이불 - 서상만



저 호작지근한 것이 내 삶의 덮개라고 생각했다
철마다 이불을 갈아 덮다보니 내 체온의 무게만큼 정이 들어 가을이 오면 홑이불 위에 또 한 장의 캐시미론 담요를 껴덮는다 그러나 흰색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꼭 낯익은 속치마 한 자락이 나를 감싸는 듯
이젠 그 흰 구름 색으로는 시를 쓸 수 없어서, 내 몸은 이미 색을 바꾸기는 늦었을까 때때로 베갯잇에 식은땀을 적시는 것도 아직은 짜낼 울음이 남아서일지, 매정한 밤은 내 간절함도 무시하고 조개껍데기 같은 맨살을 핥는다
깊은 밤엔 서투른 적음寂音도 소용없다
지금쯤 겨울새들은 어느 덤불에서 빈틈을 채울까 나는 오늘 농염(濃艶)한 붉은 색 담요를 꺼내 위안을 덮는다 혹 모를 낯선 정전기에 내가 까무러칠까 두려워





# 시집 제목인 적소가 생소했다. 적당히 알맞은 장소를 말하는가? 사전을 찾으니 옛날에 죄 지은 자가 유배되는 장소란다. 뜻을 알고 나니 제목이 더욱 맘에 들었다. 요즘은 생소한 단어지만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어찌 보면 나도 전생의 죄를 씻기 위해 이 땅에 유배된 죄인이다. 지은 죄가 많아 온전히 씻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사후는 수목장으로 잠들기를 결정했다. 예전에 법정 스님 머물던 불일암에 갔을 때 생전에 당신이 아끼던 후박나무 아래 영면하신 걸 보고 수목장을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 관계 없는 게 없다. 시 또한 인연이 있어야 만나고 읽게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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