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종점식당 - 김명기 시집

마루안 2018. 3. 2. 21:10

 

 

 

오래 소장하고 싶은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집어든 시집이었는데 첫장부터 가슴이 시리도록 후비는 문장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석 달, 머리맡에 두고 틈이 날 적마다 내쳐 몇 편씩 읽다가, 어느 날은 아껴가면서 한 편씩 읽다가, 또 어느 날은 시 읽는 도중에 뿌연 안개 자욱한 창밖을 한동안 바라보곤 했다.

단언컨데 근래 읽은 아니 몇 년간에 읽은 시집 중에서 단연 앞자리에 놓는다. 거의 전 편을 이 블로그에 필사해 옮겨 놓고 싶을 정도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시편이 없을 정도로 고른 작품성을 보이고 있다. 운 좋게 걸린 시집이 내 인생 시집이 된 경우다.

김명기 시인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강원도 태백에서 성장했다. 울진과 태백은 경북과 강원도로 구분되지만 거의 근접해 있는 지역이다. 울진, 봉화, 태백, 정선 등 예전에 가랑잎처럼 떠돌며 탄광촌을 여행할 때면 줄지어 늘어선 광부들 사택이 인상적이었다.

삭막하면서도 어딘가 삶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던 곳, 시인이 성장한 곳이 바로 태백의 탄광촌이었다. 그래서 시집에는 탄광촌에 관한 시가 여럿이다. 예전에 소설가 조세희 선생이 탄광촌을 담은 빼어난 사진 산문집을 남기기도 했거니와 원초적 삶의 본능이 석탄처럼 묻혀 꿈틀대는 이런 장소가 시인을 생산하는 원천이었을 것이다.

석탄의 본래 모습은 그저 까만 광산물에 불과할 뿐, 불이 붙었을 때만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시인 또한 그런 광산촌의 풍경을 보고 자란 정서를 빼어난 문학성으로 토해내고 있다. 몇 편의 시에서 유추해 보건데 사춘기의 시인은 가슴에 담긴 분노와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꽤나 반항적이었다.

온실 속에서 자란 꽃이 때깔은 고우나 조금만 소홀해도 금방 시들기 마련, 김명기 시인은 잡초처럼 자란 탓에 탄탄한 시적 내공을 다질 수 있었으리라. 애지출판사가 좋은 시집을 많이 내고 있으나 이렇게 빼어난 시집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시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는 고향에서 중장비를 몰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인과 중장비가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광부가 까마득한 갱도에서 석탄을 캤듯이 중장비로 시를 캐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쪼록 시인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