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 주영헌 시집

마루안 2018. 2. 17. 21:12

 

 

 

인연이 닿는 책은 언젠가는 내 그물망에 걸려 손에 잡힌다. 오래전에 기억했다가 발견한 책도 있고 이미 있었으나 내가 모르던 것이 나중 발견된 책도 있다. 이 시집은 이미 존재했으나 우연히 내게 발견되어 인연이 닿은 책이다.

중년에 접어 들면서 노안이 와서 눈이 쉽게 피로하고 집중력도 떨어짐을 느낀다. 아무리 외면하고 아닌 척 해도 조금씩 오줌발이 약해지는 것처럼 팔팔했던 시절의 싱싱한 눈이 발휘했던 독서력은 점점 떨어진다. 궁상스런 이런 말을 늘어 놓는 것은 읽어야 할 책은 늘어나는데 읽은 책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고를 때 더욱 까다롭게 고른다. 아무 책이나 집어 재밌게 읽는다면 무슨 문제랴. 시간도 없는데 시력이 금방 피로감을 느끼니 이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활자 중독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주영헌의 첫 시집은 아주 긴 제목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 제목부터 서정성이 짙게 느껴지는데 시집 속에 시들 또한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을 정도의 고른 작품성을 유지하고 있다. 요 근래 스무 권 가량의 시집을 읽었으나 이 시집이 단연 기억에 남는다.

나는 평론가들이 말하는 문학적 성취나 모호함으로 가득한 문장을 문학적인 용어로 해석할 능력이 없다. 그저 시를 따라 가다가 감동을 주는 시가 있으면 반복해서 읽으며 내 것으로 만드는 정도다. 줄줄 외우는 시도 없지만 소화할 능력도 안 되면서 평론가들이 추천하는 어려운 시들을 억지로 읽을 생각도 없다. 무식이 탄로날까 이해한 척 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주영헌의 시는 딱 나와 궁합이 맞는다.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문장에서 금방 이해할 수 있고 애틋한 싯구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가 많은 것도 설레는 가슴이 금방 식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를 가슴에 묻은 아픔이 있다. 이 아픔을 알고 나면 시집 제목에서 더욱 명료하게 느낄 수 있는데 그 아픔을 잘 삭여서 아리고 시린 문장으로 엮어낸 시들이 가득하다. 근래 보기 드물게 영양가 있는 시집이다. 문학평론가 안서현이 <잔여의 애잔>이란 제목으로 해설을 했다. 질질 끌지 않은 짧은 비평이 아주 명료하다.

낭중지추라고 좋은 시는 언제가는 발견되기 마련인가. 운 좋에 내 그물망에 걸려든 시집이 한없이 반갑다. 좋은 시집 하나 소개해달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집을 추천한다. 쉽게 읽히면서 여운이 오래 남는 시, 좋은 시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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