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를 숨기다 - 김점용

마루안 2018. 2. 8. 22:17

 

 

아버지를 숨기다 - 김점용
-꿈 71


산소통을 메고 사람들과 잠수를 한다 지하 물속에 납골당이 있다 세 사람은 유골을 여기저기 옮긴다 내가 유골을 꺼내자 플루트를 부는 연주자의 해골이 나오고 생전의 업적이 모자이크처럼 찍혀 있다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인데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해골 숨길 데를 찾는다

완전히 까발려지는 인생이 없듯
완전히 봉인되는 인생도 없다
아버지도 그럴 것이다
무덤만큼 뚜렷한 징표가 있을까
봉분 지주를 잡고 아버지를 묻을 때
힘주어 다졌다
선산의 솔이파리들이 바늘처럼 반짝였다

장례를 다 치르고 어머니는
가장 많이 울 줄 알았던 내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린다며 서운해하셨다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


 

 



아버지를 바꾸고 싶어하다 - 김점용
―꿈 61


허름한 판잣집, 어떤 할아버지가 찾아와 내가 자기 아들이라고 한다 전철에서 보았던 노인이다 난 아버지를 불렀다 젊은 아버지는 증거를 대보라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 눈이 움푹 들어가고 얼굴엔 턱수염이 까칠까칠 초라한 행색이다 지하철 문 앞에서 보았던 노인이 분명하다 나는 마당에 놓인 전철의 빈 의자만 바라보고 있다 비닐 지붕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아버지는 천성이 게으르고 무심했다
동네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의 허무는 신작로의 아스팔트처럼 단단했다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뽑지 않았고
고물 라디오의 건전지만 갈아 끼웠다
뒤안의 대추나무는 십수 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았다
또 다른 어머니의 제사가 돌아왔고
어린 형은 세 돌을 못 넘기고 앞산 애기장이 되었다
에이구 또 딸이구먼
남수 어머니가 피 묻은 손을 닦으며 말했다
허락도 없이 대추나무를 베어버린 건 잘한 짓이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실패작이었다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서울시립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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