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못 만나는 이별 - 김이하

마루안 2018. 2. 8. 20:56

 

 

못 만나는 이별 - 김이하

 

 

이제 가면 못 만날 거네

저물지 않는 사람의 들판 가득

낮달이 떠서 저물도록

농투사니 그림자 산 사람 등을 토닥거리고

사람의 집들 한 오라기 연기로 꿈적이고

땀내 비린 우리네 사는 아픔

거뭇거뭇 뒷산 장군 바위로 눕고

소식 없는 그대 생각 무장 얼크러져

아픈 등허리 뒤채네, 이 사람아

그대 간다면 가라 하였지만

나 몰라라 간다면 떠나라 하였지만

우린 이제 못 만날 거네

피고 지고 피고 지는 보리꽃 지고

낮달이 떠서 저물도록 내 그림자

넘실넘실 휘황한 사랑의 날은 저물어

어슴푸레한 기억 뒷산 장군 바위 아래 눕고

못 만날 거네, 이 사람아

이냥 가 버리면 우리 이 세상

시퍼런 5월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거네

 

 

*시집,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청파사

 

 

 

 

 

 

항문 외과에서 멈춘 歸路 - 김이하

 

 

남대문 시장을 돌아 나온 버스는

거칠게 몸을 흔들며 밤거리를 달린다

내가 서성이던 거리는 하나 둘 셔터를 내리고

그림자 없는 발소리와 함께 멀어진다

밤이 깊었다, 깊을수록 다급하게 내딛는 발걸음이

소란하게 잠귀를 후비며 누울 곳을 찾는 밤

그러나 아직은 뒤가 불안하다

구강기의 추억이 아직은 충분하고

나는 언제나 입을 충족시키려 애썼다

그게 탈이다, 하나의 위안은 또 하나의 불만을

시한 폭탄처럼 안고 내게 왔었다

불쾌한 여자의 추억이 그렇듯이, 오늘

유쾌한 몇 모금의 술도 내게는

완전한  사랑과 쾌락을 주진 못하고

거칠게 달리던 버스가 멎고 블루스 타임 같은 여백이

사당동 거리를 돌아본다, 밤 11시 25분

버스가 멈춰 있는 시간은 불안하다

불안 속에서 찾은 빨간 네온사인, 항문 외과의

불빛이 내 뒤로 숨어든다, 언제부턴가

실방귀가 터지고 있는 이 새로운 불안

뒤를 조심해야 한다는 걸 깜박 잊었다

시한 폭탄 같은 시계 소리에 덴 항문 외과의 불빛

빨갛다, 뒤가 보이지 않는 밤.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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