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푸른 뱀은 새가 되다 - 홍성식

마루안 2018. 2. 7. 11:06

 

 

푸른 뱀은 새가 되다 - 홍성식

 

 

아버지에게서 맡은 건

바람과 소주의 냄새였다

밤마다 이어지는 악몽

차가운 푸른 뱀은

여전히 아버지 어깨에 또아리 틀고

칠흑의 숲길을 달린다

 

놀라운 그 사건 이후

형형하던 아버지의 눈빛은 흐려지고

벼랑 근처를 배회하는 그림자가

마을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아주 가깝거나 요윈히 먼

문신(文身)의 아버지

 

밀알 하나도 숨기려 드는 궁핍의 손길들

모래 섞인 바람이 불고

새가 없는 동네의 햇볕 아래

아버지는 떨며 앉았다

여윈 어깨 위

푸른 뱀을 애써 감춘 채

 

보고 싶다 걸핏하면 윗통을 벗던

아버지의 젊은 몸

투박한 근육 위 꿈틀대던 생명

 

이미 오래전 날아가

화석의 기억으로만 남은

허물벗은 새

푸른 뱀

 

 

*시집, 아버지꽃, 화남

 

 

 

 

 

 

눈물이 아니라면 - 홍성식

 

 

유혹의 노래는 묘하게도 우울한 곡조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서로를 핥으며

언제 깰지 모르는 동면으로 절뚝이며 기어가고

힘겨이 지켜낸 합창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새봄이야 식물들 발끝을 간지르며 또 올 테지만

황량한 바람 끝내 멈추진 못하리란 것쯤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새가 되고 싶었던 열 살이 있었고

기어이 들짐승처럼 번득이는 눈매로

어디로든 쏘다니고 싶었던 스무 살

더구나 부활할 수 있다는 꿈을 버렸던 서른 살

누구도 팔 벌려 날 안아주지 않았고,

숨어서 자위하는 세월만 떠갔다

 

이미 야만과 공포를 알아버린 우리에겐

복사꽃 흐드러진 낙원의 연분홍빛 소문도

신의 황금침대에 동침하리라는 내세의 약속도

눈물처럼 가슴 먼저 적시지 않고서야

무엇 하나 믿을 수 없다

 

칠십 년을 고이 길러 온 머리칼에

정성스레 동백기름 손질하는

외할머니의 먼산바라기

그 흐린 눈가에 후두둑 꽃 이파리 떨어질 때

믿을 수 없어라, 말랐던 우리 눈가

흥건하게 적시는 눈물이라니

 

 

 

 

# 홍성식 시인은 1971년 부산 출생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초,중,고를 다녔고 광주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시경>으로 등단했다. 1999년 노동일보 문화부 기자, 2000년 오마이뉴스 창간 기자로 참여해서 현재 문학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꽃>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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