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뱀은 새가 되다 - 홍성식
아버지에게서 맡은 건
바람과 소주의 냄새였다
밤마다 이어지는 악몽
차가운 푸른 뱀은
여전히 아버지 어깨에 또아리 틀고
칠흑의 숲길을 달린다
놀라운 그 사건 이후
형형하던 아버지의 눈빛은 흐려지고
벼랑 근처를 배회하는 그림자가
마을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아주 가깝거나 요윈히 먼
문신(文身)의 아버지
밀알 하나도 숨기려 드는 궁핍의 손길들
모래 섞인 바람이 불고
새가 없는 동네의 햇볕 아래
아버지는 떨며 앉았다
여윈 어깨 위
푸른 뱀을 애써 감춘 채
보고 싶다 걸핏하면 윗통을 벗던
아버지의 젊은 몸
투박한 근육 위 꿈틀대던 생명
이미 오래전 날아가
화석의 기억으로만 남은
허물벗은 새
푸른 뱀
*시집, 아버지꽃, 화남
눈물이 아니라면 - 홍성식
유혹의 노래는 묘하게도 우울한 곡조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서로를 핥으며
언제 깰지 모르는 동면으로 절뚝이며 기어가고
힘겨이 지켜낸 합창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새봄이야 식물들 발끝을 간지르며 또 올 테지만
황량한 바람 끝내 멈추진 못하리란 것쯤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새가 되고 싶었던 열 살이 있었고
기어이 들짐승처럼 번득이는 눈매로
어디로든 쏘다니고 싶었던 스무 살
더구나 부활할 수 있다는 꿈을 버렸던 서른 살
누구도 팔 벌려 날 안아주지 않았고,
숨어서 자위하는 세월만 떠갔다
이미 야만과 공포를 알아버린 우리에겐
복사꽃 흐드러진 낙원의 연분홍빛 소문도
신의 황금침대에 동침하리라는 내세의 약속도
눈물처럼 가슴 먼저 적시지 않고서야
무엇 하나 믿을 수 없다
칠십 년을 고이 길러 온 머리칼에
정성스레 동백기름 손질하는
외할머니의 먼산바라기
그 흐린 눈가에 후두둑 꽃 이파리 떨어질 때
믿을 수 없어라, 말랐던 우리 눈가
흥건하게 적시는 눈물이라니
# 홍성식 시인은 1971년 부산 출생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초,중,고를 다녔고 광주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시경>으로 등단했다. 1999년 노동일보 문화부 기자, 2000년 오마이뉴스 창간 기자로 참여해서 현재 문학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꽃>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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