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 내리는 왕십리 - 백인덕

마루안 2018. 2. 6. 22:16



비 내리는 왕십리 - 백인덕



멀다는 건 얼마쯤일까?
눈꺼풀이 세 번, 아니 얼마나 벗겨져야 볼 수 있나


아무 일 없이 해가 지면
서너 시간 책가방에 매달린 내 청춘이 서러워
더러운 철길 따라 걸으며 난 항상 되뇌었다.
-저렇게 아름답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자고
그런 결국 붉게 으스름 다 함께 물들자는 헛소리였지만


깊다는 건 어디쯤일까?
심장이 몇 번, 아니 다시 또 수없이 무너져야 느껴지나


도망칠 땐 앞에서, 되돌아 올 땐
뒤에서만 매섭던 바람들, 함부로 흉내내고 싶었던 서른의
날들, 기쁜 기침과 쉼 없는 독서 사이 신음했다.
-저처럼 밀려가고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리라
이제사 그건 뜨겁게 살아야 했었다는 단 하나의 정언(定言)


가도 가도 왕십리,
근처 난 언제쯤 벗어날까?
라면국물에 절은 헤겔과 어깨끈이 떨어진 푸리에,
그 낡은 사랑들, 다 버릴 수 있을까?
-날이 밝아 부끄러움은 끝이 없는데, 취기에
새로 산 검정 구두코가 환하게 빛난다.


아침이다. 여기서 왕십리는 얼마쯤 될까?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북인








신진이발소 - 백인덕



섣달 그믐, 찬밥 물 말아 먹고
성긴 머리칼로 찾아든 시장 입구 이발소,
잠깐 눈맞춤에 벌써 주인은 난감한 표정인데
난 자꾸 가지런히 공구가 꽂힌 그의 가운에
눈이 간다. 잘 다려 주름 한 줄 없는 하얀 가운,
목숨을 맡겨달라는 자긍의 표지처럼
수술대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오랜 기억의 실이 잠시 흩날리고
때 절은 목에 휴지를 깔고, 다시
작은 수건을 두르고, 비닐 덮개를 씌운다.
삼중의 안전장치로 수술 준비는 끝났다.
지금부터 나의 시간이란
그의 겸손한 손가락이 머리통을 건드리면
힘의 기울기를 따라 아주 조금 방향을 꺾는 것뿐,
모가지 위 소중한 전부를 내맡겼더라도
여기서는 좌절,변절,훼절 따위 죄책감 없이
아아, 부끄러움도 없이 고개를 기울일 수 있다.
단지 5분과 8천원의 비용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다.
굳이 더 지불해야 할 것이 있다면
머리칼 한 올 안 붙어 있는 흰 가운, 시장 입구 홀로
돌아가는 문자 없는 표시등에 대한 믿음뿐,
어쩌면, 이발사와 내가 서로 모른다는 안도감일 뿐이다.


그가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머리통에 내가 놀라는 오후,
언제부터 나는 내 자신인 채 남처럼 살고 싶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