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마부 - 정원도 시집

마루안 2018. 2. 4. 23:11

 

 

 

시집을 읽으면서 한 시대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드물다. 자전적인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치 소설처럼 느꼈다. 앞 부분 몇 편을 읽다 왜 시집 제목이 마부인지를 알고부터 더욱 흥미로웠다. 시로 읽는 자서전이라 해도 되겠다.

정원도 시인은 올해 한국 나이로 60세, 맨 뒷편에 실린 시인의 산문을 읽고 시인의 생애를 알았다. 다시 찬찬히 첫장부터 시를 읽었다. 무슨 심오한 내용이나 무릎을 칠 만한 기막힌 문장은 없으나 술술 읽히는 시가 반복해서 읽어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온갖 공상과 문학 이론을 끌어다가 뜬구름 잡는 시를 쓰는 시인들과는 달랐다. 노동이 뭔지도 모르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인생을 논하는 시를 빨아주는 평론가들도 뜬구름을 잡기는 매한가지다. 대체 누구을 위한 시며 평론일까. 나처럼 무식한 독자는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정원도 시인은 마부의 아들이었다. 나도 어릴 적에 소달구지는 봤어도 말이 끄는 수레는 본 기억이 없다.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지만 시인은 아버지가 말을 끌고 새벽길을 나서 사과궤짝을 잔뜩 싣고 짐을 나르던 기억을 절절한 시로 표현한다.

시인은 아버지가 마흔 넘은 나이에 늦둥이 외동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받는다. 대구 반야월 출생으로 대구공고를 나와 포항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친엄마로 여기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흔히 구전되는 계모의 구박은 없다. 되레 아들이 친어머니가 아니란 걸 알까봐 노심초사 사랑으로 보살핀다. 시인은 낳아준 엄마가 상여길로 떠나던 날 아버지의 상복에 밴 막걸리 냄새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지만 새 엄마에게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공동 우물이 두어 개 있었고 미친년도 꼭 한 명 있었다. 얼굴이 얽은 곰보도 있었고 무당도 있었다. 시인이 살던 마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인이 어미 셋을 둘 팔자라는 점쟁이 말에 새엄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물어물어 어느 동네의 무당을 찾아가 수양 엄마로 맞는다.

광풍처럼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도 있었고 시대가 변하면서 지금은 많이 사라진 풍경이다. 굿이란 것도 당시는 조상을 좋은 곳으로 보내는 굿이 많았는데 지금은 자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점쟁이에게 길흉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집은 사라진 우리 문화의 풍경을 생각하게 한다. 이 시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런 풍경을 직접 경험한 50대 이상일 것이다. 정원도 시인은 만들어진 시인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감성적인 정서를 가진 타고난 시인이었지 싶다.

시에 나오는 몇 구절만 발췌하면 <미루나무 꼭대기 막막하던 슬픔>, <배 고프던 날 튀밥 같이 하얀 꽃>, <탁배기 한 잔 못 잊어 어느 해거름에 다시 돌아와 들녘을 지나가는 바람이 되었는가> 등 보석처럼 박힌 구절에 오래 눈길이 간다.

이 시집을 읽고 나서 시인의 이전 시집을 찾아 읽었다. 첫 시집은 구하지 못했고 두 번째 시집인 <귀뚜라미 생포작전>을 읽었다. 그러나 같은 시인의 시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밋밋했다. 시인이야 꾹꾹 눌러 절박하게 시를 썼겠지만 별 감흥이 없는 걸 어쩌겠는가. 내가 시 읽는 내공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억지로 공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먼저 나온 시집부터 접했다면 시인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어쨌든 세 번째 시집인 <마부>에서 간만에 떨리는 마음으로 시를 읽었다. 특히 시와 거리를 둔 오십대 이후 중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시집은 쏟아져 나오지만 자주 꺼내 읽고 싶은 시집은 많지 않은 시대다. 이런 시집 한 권쯤 책꽂이에 두고 이따금 꺼내 읽어보면 어떨까. 정원도 시인은 이 시집 하나만으로 충분히 시인 소리 들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