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 김광수 시집

마루안 2018. 1. 31. 23:49

 

 

 

요즘 이 사람 시에 빠져 틈 날 때마다 펼쳐보고 있다. 잡지 문학과경계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낸 시집인데 이름에서 보듯 중심이 아닌 변방에 있는 시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다.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유명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시집도 재판을 찍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무명 출판사는 오죽할까. 출판사든 시인이든 돈 벌 생각보다 시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없으면 이런 시집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없다.

 

처음의 열정과는 달리 몇 권 내다가 얼마 못가 발행을 멈춘 출판사가 얼마나 많던가. 내 천성이 변방에 있어야 마음이 더 편한 아웃사이더라 이런 시집에 눈길이 가는 편이다.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는 김광수 시인의 첫 시집이다.

 

마흔이 다 된 2002년에 등단했으니 등단 15년 만에 첫 시집이 나왔다. 그래서 최근에 쓴 시보다 오래된 시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시가 유통기한이 없거나 길기 때문이다. 나는 유행을 타지 않는 이런 시가 좋다. 

 

김광수 시인은 오랜 기간 국내 정보 기관에서 일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64년 전남 구례 출생으로 전남대 법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동방불교대 승가학과를 졸업한다. 중국 상해 복단대에서 중국어와 한문을 공부했다고 하니 이 시인의 학문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력도 그렇거니와 앞으로 가야 할 이 사람의 걷는 길 또한 평범하지는 않을 듯하다. 이 시인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시를 읽으며 문득 든 생각이다. 시집 곳곳에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담겨 있다.

 

 

*꿈이라면 좋겠네 스냅사진 속의 그대와 나
남산식물원 분수 백합처럼 희게 피어있고
봄 햇살은 그대 빨간 구두 위에서
즐겁게 물장구치고 있는데
어디로 갔는가?
어디에 있는가?
꿈이라면 좋겠네
이승의 어느 귀퉁이에서
같이 숨만 쉬고 있어도 좋겠네

 

*시/ 도망(悼亡)/ 일부

 

 

병든 아내를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떠나보냈을 시인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전해온다. 이런 걸 순애보라고 하던가. 나는 기적은 믿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운명이란 걸 믿는다. 우주의 역사가 아무리 길다 해도 내가 세상에 나오면서 우주는 시작되었다.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비록 티끌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우주적인 이유다.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베네수엘라의 혼돈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한글을 익혀 이 시집을 읽은 것 또한 운명이다. 시인의 건필을 빈다.

 

 

후회 - 김광수

 

내 몸이 아직 살아 있어
이마트에서 구두 한 켤레 사 신고
원추리 새싹 돋는 공원길 걷네
백목련 피어있고
진달래 피려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봄에,
나는 발에 잘 맞는 구두 한 켤레 사 신고
저 혼자 출렁거리는 그림자를 밟네
옛 느티나무는 없는데
옛 느티나무 그림자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출렁출렁거리네
이 걷잡을 수 없는 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발에 잘 맞는 구두 한 켤레 사 신고
저 혼자 출렁거리는 그림자 밟고 서서
한숨짓는 것뿐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