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건달의 회고록 - 유현아

마루안 2018. 1. 27. 21:28



건달의 회고록 - 유현아



무엇을 잃어버렸나
미루적거리며 그 골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무쇠팔 무쇠주먹이 건달의 골목들을 쓸고간다


한때 주먹 하나로 그 골목을 평정했더라는데
뽐내기 위해 추억 따위 바닥에 흘리고 다녔다는데
용맹스럽던 뱀의 무늬는 각질이 되어 있고
옛애인은 나이 들어 감감무소식이다


파격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의 답을 향해
도시의 험담을 늘어놓는 자폐아들이여
참을 수 없는 환멸에 대한 지독한 가려움이여
입 속에서 옹알거리는 사막의 흐느낌이여
그 모든 것은 건달의 그리움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건달의 주먹은 막걸리 뚜껑 돌리는 것으로 끝난다
곧 이사 갈 골목의 술집에서
떠도는 말들이나 주워 담고 있는 것은
그래, 건달의 회고록을 위해서라고 하자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애지








능청스런 종각역 - 유현아



방 한 칸 그리울 때
나는 종각역으로 가요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방 한 칸
바닥재는 코리아헤럴드 경제신문지더군요
처음으로 벽을 세운 남자예요
자신의 방 한 칸을 자랑하고 싶다는 듯
스치로폼으로 둘러친 낮은 벽은
싱싱한 왈츠가 파르르 흘러요
천정이 제일 마음에 들지요
누웠을 때 들썩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발자국 소리들
집세를 내지 않는 것이 큰 행복이지요
가끔씩 집을 들고 잠시 동안
그늘에 숨어 있으면 되니까요
헐렁한 그의 집은 휘파람만 불어도 날아가요
평당 가격이 만만치 않을 종각 지하철 계단 옆
번지 새가듯 금을 그어놓고
저녁 7시에 시집을 베개 삼아
단단한 벽을 마누라 삼아
잠을 자는 남자
어느 집보다 견고해 보여요
종각 지하철역 늦은 시간 깔끔한
남자의 방 한 칸 구경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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