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봉천동 파랑새 - 김응수

마루안 2018. 1. 19. 20:23

 

 

봉천동 파랑새 - 김응수


버스에서 내려
얼어붙은 보도를 미끄러지며 내려가면
연탄난로 모글모글 피어오르는 순댓국집
국물을 불며 소주를 나누어 마시면
시상만은 불길처럼 올랐다

포개지듯 드러누운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의 약국 옆
주차장에 세 들어 살던 형
셔터를 열면 세상은 그만큼 열렸다
약국아가씨를 좋아하던 형은
아픈 데도 없이 박카스를 사오고
손잡이에 놓인 돌멩이를 치우곤, 간혹 거렁뱅이가
셔터를 올려 놀라곤 했다

여주인은 순댓국 푸기에 바쁜데
주인 남자는 소주를 들이키며
금달래 이야기를 했지
낙성대 입구에 살던 조금 모자라던 처녀
이놈, 저놈이 꼬드켜 아랫도리를 벌리더니만
떼기를 너덧 차례, 오늘은
어미가 못 참겠다며 배꼽수술 해버리고 왔다고 하는구만

소주 한잔을 마시고
교차로 쪽 둔덕을 미끄러지며 기어오르면
연탄난로 모글모글 피어오르는 순댓국집
연탄재가 뿌려진 보도를 골라
허리 굽은 노인처럼 버스 정류장으로 오르면
시상만은 불길처럼 올랐다


*시집, 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 고요아침

 

 

 

 

 

 

귀가(歸家) - 김응수

 

 

찬비 후득이는 늦가을 저녁

코 벗겨진 낡은 구두를 벗다

오른 쪽 굽창이 떨어져나간 것을 알았다

 

낙엽의 잔해가 눌어붙고, 잔모래가 끼인 뒷굽

볼 틈도 없이 여름을 밟다가 가을을 밟는구나

흙가루 덕지덕지 묻은 구두

한동안 세상의 차이를 모르고

무딘 감각으로 지하철을 타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옹이 진 발바닥을 숨기고

먹이를 구해 여자를 안아 세상을 배웠구나

가을을 놓치는 사이 흰 꽃과 보랏꽃은 번갈아 지고

아픔을 숨죽인 채 너 헐떡이며 달려왔구나

좌우로 흔들리는 중심을 잡으려

비틀거리면서 어찌 견디었느냐

서러움을 견디었느냐

간만에 목젖을 울리며 내려다 본다

 

고맙다, 다리야

 

 

 


# 김응수: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나 부산과 서울에서 혜광고와 관악고, 한양의대를 졸업했다. 의학박사, 흉부외과 전문의, 중환자의학 세부전문의, 대체의학(통합의학) 인정의다. 1993년 계간 <시와사회>를 통해 등단했다. 한양대병원, 부천세종병원 등을 거쳐 한전의료재단 한일병원에서 지역 응급의료센터장과 병원장을 지냈다. 2011년 서울문학인대회에서 <가장 문학적인 의료인상>을 받았다. <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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