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일요일의 장례식 - 이병률

마루안 2017. 12. 19. 19:38

 

 

내 일요일의 장례식 - 이병률

 

 

나의 일일 것이므로 나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비극인지 모른다
달과 함께 묻힐 거라면 달은 어쩌면 내가 낳은 아이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내가 잠궈 내다버린 트렁크일 수도
하여 문득 나를 깨운 공기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내가 병을 이기지 못하여 어두운 거리를 기웃거리다 만난 아픈 이마일 수도
엊저녁부터 늦은 밤 사이 나를 관통한 현실일 수도 있어서
나는 누운 나를 애써 모른 체하고
내 온몸의 동굴 속을 빠져나가는 황량한 바람만을 생각하면 그뿐
그리하여 일생의 사랑은 선전될 것이나
나에 의해 원활하게나마 수거되기도 할 것이다
칠일을 다 살았다면 더 캄캄해도 아무 상관없지 않겠는가
한시절을 접고 장례식을 빠져나온 나는 관음증에 시달리지 않겠는가
구멍 속을 빠져나와 바람의 기운들과 단단해져 거리를 떠돌다가도
일요일 다음에 오는 월요일은 미래가 아니지 않겠는가
미래가 아니라고 고개 저을 때마다
또 하나의 상자가 배달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또 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집, 바람의 사생활, 창비

 

 

 

 

 


어두운 골목 붉은 등 하나 - 이병률

 

 

상가(喪家) 음식에서 착한 맛이 난다는 생각을 하는 데 오래
모르는 문상객들 틈에 앉아 눈 맞춰가며
그래도 먹어야 하는 일이 괜찮아진 지 오래


조금 싸다가 한 며칠 차려 먹으면 좋겠다 싶게
상가 음식은 이 세상 마지막 맛인 듯 맛나고
상가를 지키는 이들의 말소리는 생전에 가장 달고


배고프지 않았는데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지 몰라
나무젓가락 포장지 접은 걸로
탁자 밑에 알지도 못하는 글씨를 쓰고 있노라면
국 한 그릇 더 떠오며
등짝에 손을 얹는 두툼한 고인의 손길
상주를 반짝 업어 왁자한 술청으로 내빼고만 싶은데
술 한잔 받으라며 어깨를 누르는 고인의 텁텁한 숨결


영정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착하게 온전히 살다 가느냐며 묻고 싶은데
번번이 망설이다 방을 나서는 길
복잡한 신발이나 가지런히 해놓고 싶어도
아무리 세어봐도 한 사람의 몫이 모자라고
나는 돌아갈 때
어둑한 문간에 붉은 등 대신
신발을 벗어두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생각한 지 오래

 

 

 

 

# 이병률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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