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마루안 2017. 12. 17. 18:15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를 뽑아 던지던 지붕과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몇 번씩 부서졌다 새로 지은 신흥 주택 창문으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초승달처럼 걸려 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텔레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낯설어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어디선가 등불 하나가 켜지고 있었다
희미한 호박 등처럼 어른거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시집, 나는 누가 살다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착불(着拂) - 권대웅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나를 지불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 14년 만에 권대웅 시인이 시집을 냈다. <휘어진 길 저쪽>을 읽을 때 이 시를 전에 읽은 기억이 났다. 분명 읽었는데 누구의 시인지는 기억이 안난다. 혹시 이 사람 표절? 알고 보니 14년 전에 나온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에 같은 제목이 실렸다. 읽어보니 성형수술을 많이 했다. 같은 제목에 두 개의 시라 해도 될 정도로 많이 바꼈다. 시인의 대표작이라도 해도 될 정도로 좋은 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순의 어느 날 - 허형만  (0) 2017.12.17
송년회 - 황인숙  (0) 2017.12.17
첫눈 - 조인선   (0) 2017.12.16
그대에게 닿는 허기 - 임곤택  (0) 2017.12.16
기쁜 소식 하나, 슬픈 소식 둘 - 현택훈  (0) 2017.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