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대에게 닿는 허기 - 임곤택

마루안 2017. 12. 16. 21:19

 

 

그대에게 닿는 허기 - 임곤택

 

 

그대 담장의 그늘 아래 발을 찔러 넣는다

확인하고 싶은 사랑이 있다

 

더 자라지 않았고 자라고 싶지 않았다

어느 불멸의 손버릇이 내 몸을 버스에 태우고

가방을 들어 올리고 시계를 보게 한다

아침이 다시

아침이 되는 일의 어려움

 

길의 조각들이 덜컥덜컥 귀를 모은다

시큼한 웃음소리로

닫힌 대문들이 차려놓은 허기를 우리 즐거이 받았으나

아기를 품에 안은 여자와 그녀의 늙은 애미가

느릿느릿 눈앞을 지난다

 

당신이 몇 개의 지붕을 허물었는지

몇 알의 곡식을 거두었는지 모르고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이 지어준 죄를 갖고 나는 태어났다

당신을 닮은 들판과 들판의 소나무를 닮는 일

나는 서두른다

 

허공의 거대한 활을 보았으므로

당신으로부터 낱낱이 적중하는 나는 광기 들린 나뭇잎

하나의 몸으로

어떻게 여러 번의 추락이 가능한지

 

물과 소금은 잠시 혀를 지나고

열 개의 바람개비가 돈다

열 개의 종잇장 같은 바람이

노인의 얼굴을 덮고 그네 뒤로 숨는다

한 조각 마른 빵에 몰리는 푸른 거품

주인이 바뀐 폐염전 바닥에

반짝거리는 빛

 

확인하고 싶은 사랑이 있다

누가 목구멍의 검은 종기를 빨아내는지

그 덮고 물컹한 기쁨을 왜 자꾸 뱉어놓는지

백 일은 붉고

백 일은 없는 내 사랑

당신의 무심으로 속을 채우던 때의 흔한 이야기

 

 

*시집, 지상의 하루, 문예중앙

 

 

 

 

 

 

당신과 나의 숲 - 임곤택


내가 움켜쥔 하늘처럼 당신은 파란데
나무들은 소란하고
당신은 고백으로만 말하려 하고
나무가 노를 저어 노를 저어 나는 오가고
나무가 저은 배이므로 나는 아무 곳에도 닿지 않고
뒤에 선 나무들이
일제히 제 앞의 나무들을 뚫고 나오면서
숲엔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는데

이 질투는, 이 근심은
혼자 들을 수 없는 당신의 고백은

당신은 자꾸 반복하므로 나는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같은 버스를 타고
당신 한 사람으로 꽉 찬 세상을 맹렬히 가리키며
어둡고 투명한 숲 속을 오가는데
그치지 않는
몸의 뜨거운 염려는 숲에서 배를 곯는데

나무들은
고맙다, 말 걸지 않아서
고맙다, 위로하지 않아서

 

 

 

# 임곤택 시인은 전남 나주 출생으로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4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상의 하루>,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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