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아흔 즈음에 - 김열규

마루안 2017. 12. 15. 19:32

 

 

 

20대 이후 아주 오랫만에 김열규 선생의 책을 읽었다. 많은 것이 불만 투성이였던 20대에 몇몇 친구와 독서 모임을 가졌다. 몇 년 지나 금방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지만 한동안 아주 치열하게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깊이는 없고 목소리만 컸던 토론이 대부분이었지만 열정은 있었다.

각자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추천하면 그 책을 읽고 느낌을 말하는 거였다. 그때 읽었던 책이 김열규 선생님의 책이었다. 제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국학에 관한 책이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열규 선생님이 저자였다.

지나온 내 인생이 그렇듯이 럭비공처럼 갈피를 못잡아서 책 읽기 또한 꾸준한 일관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숙자 직전의 바닥까지 내려간 상황에서 나를 지탱해준 것은 책이었다. 활자가 나에겐 비타민 같은 삶의 활력소다.

이 책은 팔순을 넘긴 선생께서 노년을 시골에서 보내며 지난 삶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노환과 불면증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정갈한 사색이 가슴에 다가온다. 나도 이처럼 깨끗하게 늙을 수 있을까.

이 책은 김열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유고집으로 나왔다. 선생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흔 즈음에>라는 제목은 아흔을 짚으면서 쓴 선생의 책 내용에서 따왔다. 거기서 선생이 구순인 卒壽를 말하면서 숫자 九에 관해 흥미롭게 언급한다.

그리고 남은 생 餘生을 말하면서 당신의 여생이 서글프고 애달픈 한편 은은한 여광의 빛살로 고여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리고 남겨진 것이기에 더한층 귀하고 소중하다면서 남은 찌꺼기가 아닌 그 앞의 모든 것의 열매이고 보람이란다.

이렇게 곱게 늙어 삶을 마친 노학자의 말씀이 새록새록 가슴에 스며든다. 누군들 늙고 싶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늙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선생처럼 늘 깨어 있어야 삶을 바라보는 눈도 긍정적이다. 책 읽은 뒤끝의 여운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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