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의 처방을 묻다 - 고재종

마루안 2017. 12. 4. 21:29



생의 처방을 묻다 - 고재종



진찰 받고 대기실에 망연히 앉아
처방전이 나오길 기다린다
이 병은 낫지 않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를 잘 하셔야 합니다
관리를 잘 하여 집행을 유예받을 뿐인
죽음의 피보험자들이
병원 안내판에 적힌 병명 만큼이나 다양한
생의 이유를 끌어안고 처방전을 기다리는데 
청담동 처녀보살이 참 용하답디다
중국에서 온 환인데 그 병엔 직방이래요
직방이며 비방들이 한 차례 나돈다 하지만
병원 안에 비쳐 든 햇살에
부유하는 수많은 먼지 만큼이나 착잡한
저들의 눈은 벌써부터 아득해지고, 아직도
누군 농담이 남아 간호사에게
엉덩이를 까 들이밀어도 부끄럼이 없으면
더는 생을 기대할 수 없다고 낄낄대는데
이 꽃 저 꽃 다 빼가고 형태만 남은 화환 같은
사랑조차도 없이 견디는 시간,
웬걸 창 의 태산목 새하얀 큰 꽃송이들이
내 잊을 수 없는 일들의 비망록에 등재되며
잠시 환한 영혼의 출구를 마련할 뿐
처방전은 과연 나오는 것인가
저마다의 생의 이유들을 다스릴
처방전이 어디 있기는 있다는 것인가



*고재종 시집, 꽃의 권력, 문학수첩








길 위의 연대기  고재종



어느 개그맨의 상투적인 농담처럼
일찍이 요절하지도 못했다면
산이 저기 있고, 강물이 산을 감아 돌듯
어떤 굴절에도 나를 맞추고 살 일이던가.
돌아보면 치욕과 수모, 황폐뿐인
연대기를 안고 길에 어슬렁거리다 보면
바람 자락에 사운거리는 풀잎 앞에서조차
소모될 줄 모르는 생각의 과잉이려니,
아직 비를 쏟아내지 않은 비구름처럼
무거운 우울로 마구 몰려오는
기름때에 전 머리칼 속의 천근 유목이라니!
어둠에 익숙해져 퇴화된 시력쯤으로
메마른 길의 굴곡과 요철을 더듬거리며
나는 시방 어디에 있는지
나는 시방 누구인지, 더듬거리는데
어쩌면 줄지어선 가로수로 사라지는 소실점의
그 너머쯤이면 나는 과연 나 자신일까?
눈에 막힌 산중에서 막버스를 기다리는 노파가
품을 법한 희망 정도로나 길을 묻는
내게 적용할 수식어는 몇 개나 될까?
칠흑 적막을 그어 대는 단 몇 초의 성냥불로라도
걸어온 길의 이정을 모두 밝힐 수만 있다면
시간은 제 뚜벅 걸음을 멈추지 않으리.
사랑은 추억의 황홀을 굴리고
나는 쑥국새처럼 늙어 가며 내 길을 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