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 신용목

마루안 2017. 12. 5. 21:53



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 신용목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지만
아침마다 눈을 뜬다, 가장 분명한 당위는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나무들은 침묵으로 자신을 견딘다,


눈부신 높이의 부르튼 침묵 속에서


아무도
운명에 의견을 제출한 적 없다

내가 사는 곳에는 네 이름을 대신한 집들이 푸른 지붕을 올리고,


흔들리는 창문으로 흔들리다 물드는 창문으로 물들다가

떨어지는 창문으로 떨어지는 잎들이 깨지는 창문으로
캄캄한 땅 속에 조각 난 유적처럼 잎잎이 아프게 박혀들 때


엘리베이터는 자주 중세를 지나간다, 지하 1층에서 발굴되는 것들
환하게 떨어지는 창문을 달고
툭, 꺼지는 조명처럼


나의 절망은 고대에 묻혀 있다
지하 2층


아무도 파보지 않는 깊이에


내가 사는 곳에는 새들의 지저귐이나

골목 어귀에서 나 대신 머리를 감싸 쥐고 쭈그려 앉은 젊은 남자,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4층에 산다 30억 년쯤 뒤의 지층에


나무는
캄캄한 땅 속에 조각 난 말들을 잎잎이 창문으로 박아놓았다
어두운 깊이의 짓무른 침묵 속에서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지만

날마다 멀리 고층 아파트 불빛을 바라본다
우리의 미래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을



*시집, 아무 날의 도시, 문학과지성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 신용목

 
 

공원 벤치에
누워서 바라보면 구름의 수염 같은 나뭇잎들 누워서 바라보면
하얗게 떨어지는 별의 비듬들 누워서 바라보며
칼자루처럼 지붕에 꽂혀 있는 붉은 십자가와
한켠에 가시넝쿨로 모여앉아 장미 같은 담뱃불 뒤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어린 연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버려진 매트리스에 붙은 수거용 스티커를 바라보며 한때의 푹신한 섹스를 추억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종량제 봉투를 꾹꾹 눌렀던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얼굴로
어느 저녁엔 시를 써볼까
어둠 속에서 자라는 환한 그림자를 밤의 기둥에 쿵쿵 머리로 박으며
방 없는 문을 달고 싶다고
벽 없는 창을 내고 싶다고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오래 눕지도 못하는 공원 벤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칠한 조립식 무지개처럼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별이 진다 깨진 어둠으로 그어 밤은 상처로 벌어지고

여태 오지 않은 것들은 결국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그대로인 기다림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너는 환하게 벌어진 밤의 상처를 열고 멀리 떠났으니까
나는 별들의 방울소리를 따 가슴 주머니에 넣었으니까
바람 불 때마다 방울소리 그러나
나는 비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