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마루안 2017. 12. 4. 19:35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시집, 호랑이 발자국, 창착과비평


 

 



감꽃 = 손택수


1

감꽃 핀다, 어디선가 소식 없는 사람들 편지라도 한장 날아들 것 같다
사람도 짐도 땟국물이 흐르는 기차길 옆 오막살이
기우고 기웠지만 어딘지 정이 헤퍼 보이는 철망을 달고
옥수수 한줌 쌀 한줌 가난을 폭죽처럼 터뜨리던
뻥튀기 할아버지, 잠들어 계신 언덕일까
아지랑이 아지랑이 마술의 주문이 오르고
햇빛에 달궈진 선로 끝 아득히 멀리서부터 기적이 울리면
뻥 튀긴 희망에 주린 배를 달래본 적 있니, 설사를 하며 속아본 적 있니
속을 줄 알면서도 튀밥이 튀면 허천나게 달려든 적이 있어!
꽃이 튄다, 저만치 떨어져서 귀를 막는다
너를 묻는 땅속 꽃씨 한줌도 성급하게 피어날까
튀밥처럼 뻥 하고 튀어오를까, 귀청이 다 떨어지도록
치밀어오르는 그리움, 아그데 아그데 감나무 굶주린 꽃이 핀다


2

감나무 아래 들어 잠에 들고 싶다
떨어진 풋감처럼 떫디떫은 잠이라도
헤 입 벌린 채 빠져들고 싶다
나무 둥치에 탯줄처럼 새끼줄을 묶어놓고
밭일 간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아가 울지 마라, 자꾸 울면 쐐기가 떨어진다
이파리로 다독다독, 자장가를 불려주던
유모의 품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다
헤 벌린 입에 젖을 물려주기 위해
흘러내리는 젖을 입속에 넣어주기 위해
아래로 축 처져 있던 감나무 가지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