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름다운 관계 - 박남준

마루안 2017. 11. 27. 19:52



아름다운 관계 - 박남준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무릎을 꺾는 사내 - 박남준



산 능선에 와서 무릎을 꺾는다
몸이 말라가며 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
주머니 속에서는 한동안
구절초며 둥글레 꽃씨들이 실로 건조한
봄꿈을 꾸었겠다


걸어온 만큼 묻어두었다 오래 묵은 상처들이
두 발을 가둔다
단풍처럼 붉은 각혈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던가
문득 가 닿을 수 없는
저편의 산봉우리가 아물거린다
다시 길을 찾아 발길 되돌려야 하나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아득해서
여기까지 몽유로 흔들려 왔지만
푸른 꿈이 내 잠의 그늘을 열고 찾아올지 몰라
그리움도 설레임도 이제 잊혀진 나이인가


작고 가벼운 것들이 눈물겹지
더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곧 겨울이 올 거야 눈감으면 흰 눈발
내 긴 잠을 덮을 거야





*자서


내일의 일보다는 지나온 길을 반문하는 일이 그리하여 가위눌리는 일이 내겐 익숙하다. 얼마나 흔들리며 여기에 이르렀는가. 조금은 나아가고자 했으나 나의 삶이며 시의 발길은 여전하다. 이제 버리기 위해, 나의 시를 위해 이 시집을 묶고 이 시집을 버린다.
마흔이 넘어서도 이따위의 시를 쓰다니....
이 시집이 그에 다름아니다.
나는 이렇게 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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