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의 생애 - 마종기

마루안 2017. 11. 26. 18:56



가을의 생애 - 마종기



젊은 날 실패한 긴 언약이
가을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던
한바탕 구절초 꽃 더미로 왔다.
오늘은 그새 나이든 꽃을 만나
술 한잔 나누며 간청하리.



어쩌다 절벽에 서서 센 척도 했지만
불길의 속내를 힘써 다듬기도 했다고
내 증인으로 나서달라 애걸하리.
화사했던 밤들도 허영만이 아니었고
때때로 실수처럼 향기도 품었다고
확실하게 증언해달라 부탁하리.


서로를 되돌아볼 나이도 되었으니
이제는 함부로 손댈 수는 없지만
그 시대에 묻어나던 은근한 향기,
구절초도 회오리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키를 낮춘 가을이 알려준다.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 꽃,
언덕이 비어 있어 떨고 있지만
네 살이 살아 있어 추운 거다.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예술만이 마지막까지
죽음과 맞선다고.....
한판 승부까지 간다고.....


꽃이 가슴을 진하게 잡으며
말을 남기려다 쓰러진다.
꽃은 결국 심장마비로 죽었다.
속사정 알고 있는 구절초 얼굴이
두 겹 세 겹의 물결로 보이고
친하던 수호천사가 미소하면서
가을의 끝막에서 깨어난다.
몇 줄의 언어가 머리를 털며
홀연히 내 앞에서 빛을 뿜는다.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








나이든 고막 - 마종기



싱싱하고 팽팽한 장구나 북같이
소리가 오면 힘차게 나를 불러 주던 고막이
이제는 곳곳에 늙은 주름살만 늘어
느슨하게 풀어진 채 소리를 잘 잡지 못한다.
나이 들어 윤기도 힘도 빠진 한 겹 살,
주위에서는 귀 검사를 해보라고 하지만
그런 것 안 해도 알지, 내가 의사 아닌가.
그보다는 늙은 고막이 오히려 고마운걸
시끄러운 소리 일일이 듣지 않아도 되고
잔소리에 응답을 안 해도 되는 딴청,
언제부턴가 깊고 은은한 소리만 즐겨 듣는다.
멀리서 오는 깨끗한 울림만 골라서 간직한다.
내 끝이 잘 보이는 오늘 같은 날에는
언젠가 들어본 저 사려 깊은 음성이
유난히 크게 울리는 사랑스런 내 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