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틈만 나면 살고 싶다 - 김경주 르포 에세이

마루안 2017. 9. 11. 19:59

 

 

 

김경주 시인의 단촐한 산문집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그가 오랜 기간 사람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세상 사는 이야기다. 내가 르포 에세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한 시인은 본업인 시를 비롯해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예술가다.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시인이 되었지만 극작가와 포에트리 슬램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보통 책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사회에서 성공한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책에서는 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내가 이 책에 확 쏠린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평소에도 결혼식장이나 칠순 잔치 참석보다 장례식장을 챙길려고 하고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에 더 관심이 있다.

<틈만 나면 살고 싶다>는 제목처럼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임시직이거나 비정규직이다. 중국집 배달원, 큰 인형을 뒤집어 쓰고 홍보를 하는 사람, 이동 조사원, 엘리베이터 걸, 애완견 산책자, 가짜 환자 알바생, 중장비 기사, 대출 상담사 등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음지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탈북자 대리운전사도 있다.

누군들 편하고 돈 많이 주는 직업을 원하지 않겠는가. 공무원, 교사, 의사, 대기업 회사원 등, 누구나 원하는 직업이지만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는 중소기업에서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며 일하거나 틈새 직장에서 살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들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김경주가 만난 사람들은 서른 일곱 명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은 시인이 지은 이름으로 영문 이니셜이나 한 글자의 이름으로 불린다. 칼, 판, 홀, 헉, 킨, 낌, 튠, 융, 탱, 팡이나 K, J, Y  등이다. 소제목처럼 붙인 짧은 문구가 강렬하게 읽힌다. <모두들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 살지. 굳이 묻지 않아도 다들 목표는 올해까지거나 이번 시험이야>. <천국이라는 게 좀 허망한 구석이 있잖아. 진짜 천국엔 안 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다소 어두운 제목을 달고 나온 문구들을 강한 긍정으로 읽었다. 키스방을 찾는 중장비 기사 <탱>의 이야기를 몇 구절 옮긴다.

<탱은 서른  아홉의 포클레인 중장비 기사다. 사타구니에 거뭇이 무성하게 자랄 만큼 연식이 찬 나이임에도 이성을 만날 기회조차 거의 없었던 탱은 요즘 뒤늦은 홍역을 치르고 있다. 밤마다 키스방에 드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자신의 포클레인 범퍼 와이퍼에 낀 전단 한 장을 본 게 화근이었다. 탱의 포클레인 삽날은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그가 밤마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양쪽 두 볼이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푹 파여간다는 것 정도>.

<서른 아홉의 탱은 키스방에서 처음으로 키스하는 방법을 배웠다. 소프트한 버드 키스부터, 햄버거 키스, 크로스 키스에서 점점 하드한 에어 키스, 딥 키스, 프렌치 키스까지,, (중략) 탱은 언젠간 키스를 할 수 있다는 마음에 행복했다. 탱은 키스를 상상할 때마다 혀가 쫄깃쫄깃해졌다. 물론 여종업원은 탱이 수위를 넘어서는 곤란한 질문을 하면 진정시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은 프로니까. 탱은 얼른 정신을 차린다>.

지금은 키스방이 유사 성행위를 하는 곳으로 타락했지만 정말 키스를 배우기 위해 그곳을 드나드는 탱의 순진함이 애틋하면서 미소를 짓게 한다. 키스방이 불법 업소로 변질되면서 탱은 고민을 한다. 잠든 홀어머니 옆에 누워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을 헤아리며 직접 키스방을 운영해보는 상상을 한다. 나는 왜 이 장에서 오래 눈길이 머물렀을까.

틈만 나면 살고 싶다는 윤성택 시인의 시에서 따왔는데 이 책과 썩 어울린다. 어두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구가 시처럼 읽힌다. 어느 시대든 자기가 사는 시대가 가장 살기 어렵다고 한다. 천 년 전의 고려시대에도 그때가 가장 살기 힘들고 사람들은 불행했다. 어쨌든 틈난 나면 살고 싶은 것 또한 사람이 사는 가장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