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정체성에 대해 고백함 - 김남극

마루안 2016. 12. 21. 22:19



내 정체성에 대해 고백함 - 김남극

 
 

말하자면 나는 원시인에 가깝다
산을 보면 산나물의 분포를 가늠하느라
위아래를 훑어보고 능선과 골을 가로지르는 식생대를 살펴보고 고도와 방위를 재어보고
봄이 오면 꼭 저 어디쯤 나물을 뜯으러 가보리라 다짐한다


또 나는 수렵인에 가깝다
정선 가는 길을 나서 여러 겹으로 허리를 접어 흐르는 오대천을 보면서
메기낚시 하기 좋은 곳과 족대로 퉁가리나 기름종개 잡을 곳을 생각하다가
자주 중앙선을 넘기도 하면서
모내기쯤이나 상강쯤 고기 잡으러 다닐 생각에 빠져
경건한 숲과 완고한 절벽을 보지 못한다


또 나는 원주민에 가까워서
골짜기 마가리까지 치뻗은 비탈밭이 묵는 걸 아쉬워하고
떠난 사람의 흔적도 지워져 추녀가 내려앉은 헌집을 건너다보며
살던 이의 흰 고무신과 감자구박과 이가 빠진 밥그릇을 생각하다가도
뒤란에 핀 뚝감자꽃을 보며 꽃 지면 뚝감자 캐러 갈 산뜻한 기대에
몰래 즐거워하기도 한다


내가 원시인이고 수렵인이고 원주민인 건 분명한 일인데
요즘은 자꾸 화전민으로 변해가는 나를 보며 자주 놀란다
어디론가 가야 할 듯하고
새 사랑을 만나야 할 듯하고
새로 아이를 낳아야 할 듯하고 또
이 삐걱거리는 생활도 갈아끼워야 할 듯하다

 


*시집,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 문학동네

 


 




 
바퀴 있는 것은 슬프다 - 김남극



바퀴 있는 것은 슬프다
어디론다 가야 하고
공기압보다 큰 짐을 실어야 하고
집 나서면 헝클어진 길을 찾아야 하니


굴뚝 모퉁이에 낡은 리어카
어둠에 바람이 빠졌다가
햇살로 바람을 뿍뿍 자아넣고
엉크런 바퀴살에 녹이 저승꽃처럼 피어도
이젠 더 싣고 갈 가계도 없는데
끌고 갈 사람도 없는데
쫒겨나고 싶지 않은
쫒겨나도 갈 곳 없는 천덕꾸러기처럼
오래 엎드려서
가끔 들여다보는 식속들 뜨뜻한 시선으로 또
뿍뿍 바퀴에 바람을 잣고 있다


바퀴가 있으나 어디론가 가지 못하는 것들은
더 슬프다


 
 



김남극 시인은 1969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생으로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고 2003년 <유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강원작가회의 사무국장이고 봉평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투박하면서 교양이 묻어나는 시가 마음을 붙잡는다. 시 쓰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대화이거나 독자와의 소통이라 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나타낼 필요가 있다. 혼자만의 넋두리도 누군가 들어주었을 때 대화가 되고 혼자만의 끄적거림도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문학이 된다. 시인의 의중을 읽어낼 수 없는 껍데기 뿐인 시가 아닌 이 시에서처럼 정체성을 가진 시를 읽고 싶다. 그런 면에서 김남극 시인은 정체성이 확실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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