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무것도 아닌 나 - 조항록

마루안 2016. 12. 10. 07:53



아무것도 아닌 나 - 조항록



받기로 한 돈이 입금되지 않은 날
짧은 전화 한 통으로 약속이 깨진 날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인연이 다한 날


밤새 핀 줄도 몰랐던 꽃들이 죄 져버렸고
끊어 넘칠 듯한 신열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
나는 문득
어떤 굴욕에도 반응할 것 같지 않은
물기 없는 고목들의 한숨을 상상했고


그저 따신 밥 먹고 제 영혼을 이불 속에 가두고
아직 철없는 아이들을 향해 끝내 유치한 뉴스를 향해
입바른 소리나 해대는 소심한 가장의 잔소리
나는 후회보다 끈질긴 습관이 싫은데


오늘 하루 양심 없이 하루만 청명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였고



*시집, 거룩한 그물, 푸른사상








가난의 긍정 - 조항록



양지가 아닌 곳에서도 생명은 살아갑니다
이 그늘이 어느 생애의 안식일 수 있습니다
돌풍이 불고 돌풍은 여전한데
더는 설레지 않는 사내가 되어
여생이 이끼처럼 숨을 쉽니다


지상의 그늘 한 칸


굴렁쇠 같은 인내의 고통을
태양 아래 새로울 것 없는 욕망을
다시는 기웃대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가끔 명치끝이 저릿할 때 있겠지만
그런 것이 소외의 완성이며
은밀한 행복의 비책이라 믿습니다


지상의 자유 한 칸


이제 와서 많은 것이 자명해진 그늘 안에
등을 보이고 앉아 화해하는 한 남자
무얼 하는지 무엇을 하든지
그가 조율하는 것은 나지막한 숨소리뿐입니다
그래도 정말 아무렇지 않습니다





# 시집 첫장에 시인의 말이 짧게 실렸다. 어쩌다 이런 시집을 읽게 되었을까. 시인의 마음이 딱 내 마음이다.


침묵을 낙엽처럼 쌓아가고 있다.

옛날 사진 속에서 내가 웃는다.  -시인의 말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 - 이문재  (0) 2016.12.22
내 정체성에 대해 고백함 - 김남극  (0) 2016.12.21
그분 - 고광헌  (0) 2016.11.25
만추(晩秋) - 성선경  (0) 2016.11.20
무소속 - 이영광  (0) 2016.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