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분 - 고광헌

마루안 2016. 11. 25. 00:28


그분 - 고광헌

 


그분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깊은 산맥입니다
지난 세월 단 한번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 좁은 가슴에 그분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 앞에선 언제나
옷깃을 여몄을 뿐
그분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예술이던 시절에도
감히 그 모습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그분이 입혀준 외투가 너무 무겁다고
너무 오래됐으니 벗어던지자고 합니다


한번도 껴안아보지 못했는데
그분이 보여준 낙원에
아직도 숫총각처럼 떨리는데
다들 그분에게서
떠나자고 합니다


가볍게 가볍게 훌훌 털고 잊어버리자고 합니다



*고광헌 시집, 시간은 무겁다, 창비

 


 





차전초 - 고광헌
 


차전초(車前草)는 질경이의 한자말
수레바퀴에 깔리면서 살아가는 풀
바퀴에 깔려 몸이 납작해지며
숨이 넘어가는 순간
제 씨앗을
수레바퀴나 짐승들 발밑에 붙여
대를 이어가는 풀


모든 풀들은 짓눌리는 고통을 피해
들로 산으로 달아나
함께 살아가는데
그늘 한 점 없는 길가에 몸 풀고 앉아
온몸이 깔리면서
생을 이어간다


수레의 발길이 잦을수록
바퀴가 구를수록
더욱 안전해지면서 멀리 가는 삶
질경이는 밟히면서 강해진다


밟혀야 살아남는 역설의 생
오늘도 납작한 잎 속에 질긴 심줄 숨기고
온몸 펼쳐 뭇발길 받아들인다
어디 한번 멋대로 분탕질도 해보라며
거친 발길에 제 몸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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