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은 나의 날 - 유계영

마루안 2016. 10. 17. 01:44



오늘은 나의 날 - 유계영



내가 너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너의 바깥에 장롱처럼 버려질 것이라는 예감은
2인용 식탁처럼 물끄러미 불행해질 것이라는 예감은


모두 틀렸다


입안에 총구를 물고 방아쇠를 당겨 봐
바람 맛이 난다고 했다
하필 내가 가진 총 속에만 가득했던 총알을
너는 모르고 나는 알았다


너와 나의 단면에 대하여
생크림 케이크처럼 근사한 협화음을 감추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너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었다


누구의 생일인지 기억나지 않는 모호한 축하를
반씩 나누는 나의 샴, 나의 뒤통수, 나의 휠체어


살았다고 감동하는 모든 순간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모든 유감이여
생일상 아래 흔들거리는 왼발 오른발이여


내게 선물한 총과 칼과 너를
나는 끝까지 좋은 것이라 부르겠다
오늘은 나의 날이다



*시집,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배우 훈련 - 유계영



파티는 서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형이 심드렁한 아가씨에게 손을 내민다


형은 오늘도 홈런을 칠까
구불구불 오린 치맛자락이 회전한다


하루가 멀게 파티가 벌어진다
덩치 큰 형들이 팍삭 늙었다
기념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으므로


나는 형들의 생물연대표를 몰래 적어 두었다
사람들이 내게 너무 많은 비밀을 들켜 버려서
자리는 되도록 피해 주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의 머리 위에는
정말 두 개의 뿔이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화난 얼굴로 잠드는 이유는
누구에게도 말해 주지 않을 거다


파티장에 버리고 온 악취가 창문을 두드린다
형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모사할 수 있을 때까지
파티는 계속되어야 한다





# 유계영 시인은 1985년 인천 출생으로 동국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온갖 것들의 낮>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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