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발의 그리움 하나 - 홍윤숙

마루안 2016. 10. 16. 21:10



백발의 그리움 하나 - 홍윤숙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일까
한 시대 에둘러 돌아와 후득이던
고향의 예감 같던 바람 소리


한 시절 바람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 몸 전체가 온통 한 푸대의 바람이었다
나는 날마다 들끓는 바람이 되어
세상의 끝을 헤매 다녔고
돌아오는 길은 고향 뒷산 밤나무 숲의
밤꽃 향기에 목이 메였다
그 시절 바람은 열이면 열 눈먼 장님이어서
분수처럼 산화하고 자폭했다


어디를 가도 꿈꾸던 나라, 도시는 없었다
인생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눈감고 돌아서는 뒷모습
그 등에 붉은 저녁노을 실의의 그림자
길게 멀어져 가고
젊고 푸르던 바람은 이렇게 이별했다


그 바람 언제부턴가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하늬바람 되어
내 가슴 시리게 후비고
밤새 눈뜨고 먼 하늘 중천에 길도 없이 떠돌고
한 주름 빗방울로 운명해 갔다 남은 생애,
이제 바람 한 점 없는 아득한 변경
어디로 갈까 길을 물어도
대답 없는 내 안의 산골짝에서
가랑잎 한 장 부서지는 소리로
귀를 씻는다
섬으로 쌓인 세월의 부피 키를 넘어 숨이 차고
가야 할 남은 길 보이지 않아
가슴엔 길로 자란 백발의 그리움 하나
출구 없는 빈 집 혼자 지킨다



*홍윤숙 시집, 그 소식, 서정시학








삶과 죽음 사이 - 홍윤숙



나는 왜 눈부시어 볼 수 없는
하늘의 태양 보려 하는가
죽어가는 사람 목숨 저미는 모습
기어이 지키려 하는가
태양과 죽음은 직시(直視)할 수 없다는데
삶과 죽음 사이
걸어놓은 목숨의 다리
그 다리 한복판에 서서
나는 왜 날마다
볼 수 없는 태양 보려 하고
죽어가는 목숨 애태우는가


이제 남은 시간 얼마나 되는지
길어도 그만 짧아도 그만
죽음 그게 뭐라고
날마다 내 마음 쥐고 흔드는가
길에서 도둑을 만나면 죽일 수도 있는데
이 세상 그 무엇도 내 것이란 없는데
왜 나는 영원이란 말에 이리 흔들리는가
사람답게 산다는 말에 가슴 아픈가


날마다 살 몇 조각 도려내는
아득히 지나온 생의 산하
너무 멀고 저물어
가슴 시리다





# 며칠전에야 홍윤숙 시인께서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을 알았다. 원로 시인의 타계 소식을 1주년이 돼서야 알게 되다니,, 나에게도 많은 굴곡이 있었고 심신을 지치게 하는 해외생활 탓이 크다. 구순을 앞둔 시인께서 이 시집이 마지막일 거라는 것을 알았을까.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 당당함과 비장함이 함께 들었다.


시인의 말


내 생애의 마지막 시집에 할말은,
다가올 죽음 앞에 당당하고 의연하게
마주 설 것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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