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둥글과 완벽한 - 최서림

마루안 2016. 8. 30. 07:58



둥글과 완벽한 - 서림
-이 세상의 방 한 칸


어느 해와 마찬가지로
고향에 가지 않거나 못 가는 날,
앞집 서울슈퍼에서 사과를 샀습니다.
어릴 적 60년대 홍옥이 그리워
그중 빨간 걸로 한 놈 집었습니다.


하루 종일 햇볕도 들지 않는 북쪽 모퉁이 내 방에서
그놈을 가만히 깨물어봅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을
혹, 방범창틀 너머로 무연히 빛나는 북쪽 하늘 한자락을
씹어보려는 듯,
과육도 과즙도 이미 삼킨 이빨로
넋없이 씹어봅니다.


한여름밤 내내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으면
어머니와 나는 종종 무명 홑이불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할머니 뱃속에서부터인지 복해도 탄광이나
이 땅의 어지러운 공기들을 마시고부터인지
방향감각 잃은 바람이 잔뜩 든 아버지는
풍선처럼 떠돌았습니다.


이 시간 큰형님닙 안방에는
차례상이 습관대로 차려져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허파의 불룩한 바람을
손과 발톱으로 살갗과 실핏줄로
성공적으로 막아낸 형님은
차례상 앞에서도 아버지 이야기 하는 일이
결단코 없습니다.


교통 핑계로 건강 핑계로
고향에 가지 않거나 못 가는 오늘,
저 북쪽 하늘 가을바람처럼 그때 그 홑이불처럼
내 갈비뼈 속에도
펄럭거리는 게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추석날 북해도 함바 근처 들국화 옆에서
덮고 자던 시린 하늘자락처럼,
한 계절 내내 내 옆구리를 저미고 후비는
그 무엇이 질기게 달라붙어 있습니다.


하늘의 속살이 다 비쳐 보이는 추석날 아침
하늘처럼 둥글고 완벽한 사과를
한 알 깨물어봅니다.
툇마루에서 아버지와 같이 씹어 먹듯이.


하늘의 맑은 속살들이 내 몸 가득가득 쟁여집니다.
이리저리 내팽개치듯
아버지를 몰고 다니던 그때 그 바람들을
북해도의 그 펄럭거리던 하늘들을
감싸안으며 높아지는 하늘의 하늘,
그 빛이, 그 단물이
세포세포 차곡차곡 스며듭니다.



*시집,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문학동네








오직 은단풍 하나로 - 서림
-이 세상의 방 한 칸



'달세방 잇슴니다'를 이마에 붙이고 메마른 바람에 덜컹거리는, 간선도로에서 떨어져나와 돌아앉은 페인트칠이 벗겨져버린 검은 철대문. 폐냉장고처럼 속이 텅 비어 있는, 무수한 세월이 짓밟고 지나가버린 주인 낯짝처럼 삭아버린 '영천고물상회'. 유리문이 누우렇게 변색해버린 룸살롱 '희야집'. 부도 맞은 '신광유리' 공장, 이러저리 흩어진 붉은 쇳조각들, 유료주차장으로 변해버린 마당, 시간이 햇볕과 더불어 졸고 있는


신광유리 공장 담벼락에
낙지같이 달라붙은 은단풍 한 그루,
아무리 둘러봐도 직경 백 미터 이내
유일한 나무 한 그루,


백 미터 이내의 먼지와 소음과 욕설과 토사물을
물과 바람과 햇빛으로 빨아들여서는,
늦가을 이파리마다마다
붉은 은빛 젖으로 짜내는 저 나무,
장검처럼 쑥쑥 가지를 뽑아보는


은단풍을 마주 보고 있는 '희야집'
맥주로 팅팅 부어오른 과부,
이 동네마냥 숨이 콱콱 막혀버린 앞가슴,
북쪽으로 난 가게문처럼 활활 열어제치고
붉은 은빛 이파리 이파리
충혈된 두 눈길로 애무하듯 핥고 있다.


땅속 어두운 데서, 흩어진 물줄기들을
와락 움켜잡으며 우뚝 일어서는 저 나무,
버팅기다가 홀로 끝내 다 떨어지고 말,
전선으로 이리저리 얽혀서 짜부러지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