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숙박계 - 이덕규

마루안 2016. 8. 14. 21:59



숙박계 - 이덕규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에 '참 따뜻했네' 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제목, 혹은 죄목도 모르고 - 이덕규



이른 가을날 늙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오래 전에 겉표지가 떨어져나간 책을 읽네 어디선가 된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네 잠시 검문하듯 바람이 방심한 책장들을 단숨에 차르륵 읽고 가네 제목도 모르고 펄럭이던 나뭇잎들이 떨어지네 불온한 전단지처럼 덧없던 함성들이 날아가네


아니네, 아니네 이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희극의 초고라고 그 차가운 계절성 순시관들에게 맞서 단호하게 부정하는 나뭇가지들, 그러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머리채를 단단하게 휘어잡은 바람은 아미 산등성이 넘어 새날 새 페이지를 열어 보이고 문득 책 속의 글자들이 우수수 쏟아지며 휩쓸려가네


아직 불온함이 유효한 곳으로, 어두컴컴한 권력의 지하실에서 재생된 빈 공책 한 권과 맞바꿔지기 위해, 또다시 그 누렇게 바랜 미래 어딘가로 송치되어 가출경위서와 반성문을 쓰기 위해.... 죄목도 모르고





# 아주 오래전 여관에 들면 숙박계에 신상정보를 기록하던 때가 있었다. 여행길에 들어간 허름한 여인숙도 어김 없이 숙박계를 내밀던 시절이었다. 연탄불에 데워진 따스한 방바닥에 등을 대면 저절로 눈이 감겨졌고 꿈결인지 어디선가 아스라히 호각 소리가 들리기도 했었다. 시를 읽다가 30년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공연히 나를 학대하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 내 삶을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