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 복효근

마루안 2016. 8. 14. 07:55



고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 복효근



이 집안은 고래로 고래 집안이다
할아버지가 그랬다고 하고
아버지가 그랬다
구들장 방고래에 불을 안 넘어가도
도갓집 술청에서 고래 목을 타고
난바다는 술술 잘 넘어갔을 것이다
그 덕에 우리는
고래 등 같은 집은 꿈에도 없었다
가끔 고래가
고래고래 질러대는 고함 소리에
이상하게도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상어도 바다코끼리도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꼬막 껍데기 같은 지붕 아래
고래 심줄 같은 가난이
우리를 친친 감아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쯤 이르러 나도 가끔 고래가 된다
항상 지는 싸움이긴 하였어도
싸우기 위해 고래가 되었을 것이다
고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생에 추웠을 것이나 맑았다는 듯
검은 이불 흩청 같은 하늘 한구석
고래자리 별들이 호롱을 켜고 있다



*시집,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로또를 포기하다 - 복효근



똥을 쌌다
누렇게 빛을 내는 굵은 황금 똥
깨어보니 꿈이었다
들은 바는 있어 부정 탈까 발설하지 않고
맨 처음 떠오르는 숫자를 기억해두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려운 두 누나 집도 지어주고
자동차를 바꾸고 아내도
아니, 아내는 이쁜 두 딸을 낳아주었으니
남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좀 더 생각해볼 것이다


직장도 바꾸고
물론 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이 버겁기만 하고
머리털 빠지는 그 짓을
뚝심 좋은 이정록 같은 이에게나 맡길 것이다


내일 퇴근 길에 들러서 사올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어디서 로또를 사지
또 뭐라고 말해야 할까 똥 꿈을 꾸었다고 쑥스럽게
그건 그렇고 내가 부자가 되면
화초에 물은 누가 줄 것이며 잡초는 어떻게 하고....,


안 되겠다
로또를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갑부가 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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