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희미해진 심장으로 - 서윤후

마루안 2016. 8. 12. 09:22



희미해진 심장으로 - 서윤후



좋은 일에 쓸 예정이다 오늘치의 어둠을 모아서 어두웠던 것을 빛나 보이게 할 생각이다


단 한 번의 불을 켜기 위해 새가 날아오른다
수비대는 밤새 침묵으로 방어했다
그 무게가 탐나서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어깨와 어깨 사이에 뼈가 있다
두 사람을 잇기 위해서 부러져야 하는 뼈
예쁘게 웃는 사람의 하얀 앞니가
오늘의 기분을 구부리는 데 성공한다


여름에 본 소년이 가을에도 소년이었을 때
겨울이 되면 안아 줄 것이다
데리러 가지 못한 봄에는 서로 모른 체하더라도
꽁꽁 언 피는 뺨과 귓불에 그치게 될 것이다
난생처음 본 난로 앞에서


견디지 못한 몇 초와
견디고 있는 몇 년을 교환할 것이다
붉은 입술이 심장의 구멍이 될 때
머뭇거리는 일을 그만두고 싶을 것이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민음사








포기 - 서윤후



나는 창문의 취미가 된다
예측되지 않는 그런 구름에 둘러싸여서
흐린 마음을 닦는다


어린아이의 발꿈치
다정하게 손잡은 노부부
이런 장면들에 눈을 질끈 감게 된다


턱을 괴고 사는 동안
미워하는 사람의 목록은 늘어 간다
나의 모국어가 타인의 사전에 없을 때
갈증은 불쑥 찾아온다


나의 최선이 너의 목을 쥐고 있었다는 것
내일의 운세에 필요한
타로 카드 몇 장을 잃어버린 것 같다


하지 말아야 할 약속들만
카페의 메뉴판처럼 두꺼워진다
이제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해


지울 때마다 번져 가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해 듣게 된다


내일 일기예보도 잘 맞히지 못하는 내가
어제의 날씨도 떠올리지 못한다
누가 나를 지울 때마다
기억을 도난당하고 허기가 진다


먹기 위해서 창문을 닫았다






# 서윤후 시인은 1990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9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본명이 서윤동으로 명지대학에 재학중일 때 19세의 나이에 등단했고 첫 시집을 냈다. 길게 지켜볼 만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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