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감꽃 - 김승강

마루안 2016. 8. 13. 09:25



감꽃 - 김승강



목욕탕에서 목욕은 하지 않고
수영장에라도 온 것처럼
알몸으로 다이빙하며 노는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이다
고추 끝에 아직 감꽃을 달고
넘어져 뒹굴고 놀다
어느 날 감꽃을 떨어낸다.
감꽃은 지는 것이 아니라
안쪽의 감이 자라면서 밀어내어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 막 감꽃을 떨어내었거나
감꽃을 스스로 잘라낸 중고등학생 나이의 청소년들은
사타구니에 무성한 감잎을 거느린 싱싱한 풋감을
수줍게 내밀고 자랑한다.
이때쯤이면 목욕탕은 수영장이 아니라
비로소 목욕탕이다.
뜨거운 탕 속에 몸을 제법 오래 담그고
끙 하고 신음하는 흉내도 낸다.
요즘 아이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우리가 클 때는 여자와 자는 것을
총알 닦는다고 했다.
풋감이 광약으로 잘 닦은 총알처럼 빛을 내려면
그때 떨어진 감꽃의 기억은
씨앗으로 감의 과육 속에 깊이 박힌다.



*시집, 흑백다방, 열림원








하류에서 - 김승강



장맛비에 불어난 강이 몸을 풀고 있다.
실핏줄처럼 얽혀 말라가던 지류들이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고
강물은 전장에서 승리한 병사처럼
자기 구역의 쓰레기들을 전리품으로 매고
구보로 합류하고 있다.


저기 수음 뒤 내 정액을 닦은 화장지가 떠간다.
네 생리혈을 받아낸 생리대가 떠간다.
네 자궁에서 척출한 네 피와 내 살 혹은
네 살과 내 피의 척출물이 떠간다.


우리가 나눈 사랑
우리가 나누지 못한 사랑이
강물이 몸을 풀며
새끼 낳는 뱀같이 양수를 터뜨리자
분비물로 쏟아진다.


병사의 구보소리가 잦아든
전리품의 집하장 하류에서
자꾸 손 흔드는 인생이 있다.
아직 못다 한 말이 있어
저녁 무렵 하류에서 맴도는데
삼천포 술집 쪼그라든 자궁의 늙은 작부
아는 얼굴이라며
반갑게 불러 세우더니
선 채라도 술 한잔 하고 가라고 소매를 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부신 길 하나 - 박두규  (0) 2016.08.14
고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 복효근  (0) 2016.08.14
길 - 황규관  (0) 2016.08.13
희미해진 심장으로 - 서윤후  (0) 2016.08.12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 김점용  (0) 201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