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집을 태우며 - 원무현

마루안 2016. 8. 4. 08:50



시집을 태우며 - 원무현



내 심장이라고 건네주었던
내 심장이라며 가져갔던
시집이여,
귀 기울이면
흐르는 강물의 도도한 소리가 들리고
손 뻗치면
식물이 꽃을 피우기 위해 펌프질하는 소리가 만져진다고 했던
그렇게 자부했던 너를 회수해 불태운다
법에도 없는 법외의 형벌
너무한 것 아니냐고 따지지 마라
못난 놈도 자식 아니냐며 울부짖지도 마라
너의 죄를 다시 말하노니
무엇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한 쪽 심장이 없는 듯 허한 사람 품에 안겼을 때
기꺼이 그의 심장이 되어주지 못한 죄
죽어서도 씻을 수 없는 것이니
화형!
죄 값치고는 가벼운 줄 알라
목숨 바쳐 사랑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생면부지로 대하는
사람이 사람의 심장을 버린 땅에나 있을 법한
관심 밖 형벌이 아님을 천만다행으로 알라



*시집, 사소한 아주 사소한, 지혜








지상낙원 - 원무현



십년단골 구멍가게도 외면하던
삼년 백수를 받아준 곳은 실로암공동묘지다
간밤 눈 내린 묘역에 볕이라도 내리면
호빵처럼 김 모락모락 피워 올리던 무덤들
그 무덤들 보살핀 덕분에
나 한 삼년 배고픈 줄도 추운 줄도 몰랐다
그리하여 출근 때면 하던 자문
산 자는 죽은 자를 제 몸같이 돌보고
죽은 자는 산 자를 먹이느라 노숙을 마다않는
공동묘지 여기가 어디
 

나 요즘 한 여자를 내 안에 모셔놓고 산다
좀체 웃지 않고 좀체 말이 없는
게다가 아이까지 들어서지 않는 여자
나는 무덤 같은 그녀가 앉으나 서나 그립다 
그녀는, 눈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가는 세상 속에서 부대낀 얼굴
말없이 파묻어 주는 젖무덤을 가졌다
묘역을 감도는 봄바람처럼 감미로운 숨결도 가졌다
그런 그녀 품에 안기면 내 몸은 금세 오월
햇살이 놀다간 상석처럼 따뜻해진다
점심은 챙겨 드셨나요
비문처럼 곱게 써내려간 그녀의 궁서체 문자메시지를 받는 순간엔
월말결산에 짓눌린 내 어깨
가문 날 비 먹은 풀 무덤처럼 싱싱하게 일어난다
그럴 때면 날리는 답신
당신과 내가 함께 사는 여기가 어디





# 예전에 이 시인이 기존에 발간한 시집을 모두 태웠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진짜로 그랬는지 문학적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전부터 나름 열심이 시 읽기를 한 나도 원무현의 시를 읽은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일종의 시에 대한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시에 대한 집착이 강한 시인으로 보인다. 어쨌든 나는 이런 시가 좋으니 태운 시집이 있다면 복원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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