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 기형도

마루안 2016. 8. 4. 06:54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기형도 추모 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솔








노을 - 기형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刑量(형량)
단 한 번의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速度)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 기형도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나온 후 시인의 5주기 추모 문집에는 <입 속에 검은 잎>에 실리지 않은 16편의 미발표 시가 실렸다. 그 중에서 고른 시다.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지만 그 때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던 기억이 새롭다. 시인은 떠났지만 불멸의 시는 남아서 이렇게 독자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준다. 문학이 위대한 점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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