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식은 풍경 - 이영광

마루안 2016. 8. 3. 20:39



식은 풍경 - 이영광



눈 그치다 그러나, 길 끊기다
젖은 소포와 몇 장의 연하장,
연락하지 말자는 연락이 왔다


폭설이 세상을 아득히 데려가버릴 때까지
나는 불타올랐으나, 결국 식었던 거다
늙은 바람은 한계를 눈 단장하여
아파트 담벽 아홉시 방향의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숲으로 세워둔다, 허나
어떤 풍경도 풍경의 안에 무너졌을 뿐


깨뜨릴 수 없는 얼음의 벽이 있고
고요하고 부드럽게 눈이 내렸고
고행하듯 술병은 떨어져 뒹굴었고
그리고, 오후 네시의 하늘과 잿빛의 새


그대의 연락에 의해
불현듯 이 세상은 어두워졌다, 그래서
앉아서도 지치는 마음이 여기에
앉아 있다, 오후 네시의 실내
행운목이 없는 베란다


폭설 이쪽의 세상이 바로 저 세상이란 걸
저 세상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라는 듯 귀소하는
하늘의 젖은 새, 허나
어떤 풍경도 풍경의 안에 숨졌을 뿐


그렇다, 오늘 나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아요
늦어버린 너무 늦어버린



*시집, 그늘과 사귀다, 랜덤하우스








절.1 - 이영광



늙은 몸은 절하기 위해 절에 온다
절 가지고 될 일도 안 될 일도 있고
절 없이도 일은 되기도 안 되기도 하는 것인데,
그저 모든 걸 다 들어 바치는 절은
내가 받는 듯, 난감하다
온몸으로 사지를 구부리고
두 손에 그 힘을 받쳐 올렸다가
다시 통째로 내려놓는 절
성한 데 없는 늙은 뼈가 웅웅
또 저만 빼고, 일문의 안녕을 엎드려 비는데
나는 그만 절을 피해
배롱나무 그늘로 들어간다
늙은 나무가 가득히 피워놓은 붉은 꽃들
또한 절하는 자세여서,
절 안에서 내다보면
그늘 밖에는 햇볕에 타는 어지러운 한세상이
꽃잎에 싸여 엎드린 아름다운 몸이, 있다
결정적인 일은 다 절 가지고는 안 되었는데
몸은 아직 더 결정적인 일이 남아 있다는 거다
몸은 무너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무너졌는데도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다
아, 꽃잎은 그런 당신을 끝없이 적신다
어머니 뼈는 저 자세에서 가장 단단하고 구멍 없다
저 자세는 몸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수없이 많은 절 이미 받고
이 몸 헤롱헤롱 두 발로 잘 걸어왔으니,
결정적인 것들은 잠시 미결로 두라 하고
한번 시들면 다시 못 볼 것 같은 꽃그늘 아래서
나는 당신 몸에 오래 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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