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현관, 그리고 벗어놓은 신발 - 심재휘

마루안 2016. 8. 3. 00:01



현관, 그리고 벗어놓은 신발 - 심재휘



세월을 용서하며 서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의 언덕에 오른다 그곳에서 간혹
아득히 내 집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런 날 마을의 길이 낯설고
골목에서 새어나오는 바람들만 얼굴을 스치고
알고 간 길이 막다른 골목일 때
그저 오래 눈에 익혀온 주름진 손을 들어
바람의 깊은 냄새를 맡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손금을 파듯 거리를 걷는다
술집은 저녁과 밤의 경계에 있고 누군가는
한없이 긴 통화에 외로움을 탕진하기도 한다
그 바람의 경치를 마주보며 나는
천천히 얼굴을 쓸어 내린다 그러면
눈썹 즈음에서 딱딱하게 만져지는 고독과
고려당 애플파이 앞에서 다시 느끼는
놀라운 허기


귀가는 언제나 불 꺼진 방의
불을 끄기 위한 것인데 현관이 좁고
어두운 것은 누구를 의한 예의인가
거실의 소파는 오직 낡기 위해 누워 있고
미니시리즈는 예고편까지도 녹화방영이므로
나는 늘 재방송이 궁금하다
그런데 왜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에는
아직도 내가 벗겨지지 않은 채 서 있는지
도대체 또 어디로 가려는지
참 알 수가 없다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문학세계사








新귀촉도 - 심재휘 
-서역의 밤기차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서정주의 <귀촉도> 중에서



나 그대 떠나 멀리를 왔다
삼만 리 머나먼 서역에서는
해가 늦게 지더라 젖은 옷은 쉬 마르고
마음에 쓰는 내 사랑도 음차가 되어
차창 밖에선 바람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사력(沙力)을 다해 풍화되는 밤이었다
돌아보면 창밖은 언제나 실크로드였는데
그대가 슬픈 신을 삼는 동안에도
이곳의 나는 여전히 단단한 고비였다


멀리 떠나가면 내 안의 먼 곳도 보일까
우루무치에서 돈황 가는 새벽 한시의 역사(驛舍)가
그저 떠나거나 보내거나이듯


이별은 사막 한가운데의 정거장처럼
모래바람에도 쉽게 묻혀버리기도 하는데
모래 속으로 사라진 슬픈 유적을 지나는 것인지
간혹 기차는 심하게 덜커덩거린다 그러면
나는 기어이 제 칸에 누워 잠 못 드는 사람


나는 식민지의 시인처럼 차창의 나에게
손을 내밀어도 보고 내 사랑을 그려도 보는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유리에 비친 모습은 사라지고
내내 보일 듯만 하던 어둠의 풍경이 환해진다
그렇구나 황사들은 환도((還都)할 곳의 봄하늘을 읽으며
이 막막함에 누워 사막이었던 거였구나
열었다가 또 닫는 누군가의 손들로 이미 더러워진
커튼을 나도 닫으며 배낭의 한쪽 귀를 연다
날은 쉬 밝아올 것 같지 않고
여의치 않은 그리움에 엎드려 미당을 읽는 파촉의 밤
기차는 귀촉 귀촉 흔들리며 참 한없이도 간다



*고비: 서역에서는 대평원에 깔린 작은 돌멩이들을 고비(戈壁)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