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버스 정류장 - 이미자

마루안 2016. 8. 1. 22:52



버스 정류장 - 이미자



손톱으로 누르면
무른 한낮이 복숭아처럼 으깨진다 나는
여전히 연애는 신파라고 생각하지만
떠나간 남자가 신문을 펼치면
전단지처럼 몰래 눈물을 끼워넣을 줄도 안다


버스는 늦게 온다 진부한
깨달음이 그러하듯
흙탕물이 얼룩진 사월의 평상에게
썩어가는 꽃들에게
안녕! 나는 꽃피는 폐허야
이제는 인사도 건넬 수 있는데


구월에 떠나간 남자가 커피를 쏟고
칠월에 떠나간 남자가 무릎을 닦아준다
꽃피는 시절은 누구나 눈물겹지만
마른 빗물 자국처럼 곧 희미해지지


운전기사는 검은 안경을 쓰고 페달을 밟는다
내가 모든 정류장에 설 줄 알았니?
우리들의 시들한 연애가 휘청거리는 동안
나는 괜한 허공에 삿대질을 해댄다
마침내 먼 곳으로, 아끼던 풍경들이
모두 달아날 때까지



*시집, 검은 뿔, 천년의시작








목련꽃 그늘 - 이미자



언젠가 이 담벼락 아래 발가벗고 벌서던 날이 있었다
옷 홀딱 벗겨져 쫓겨났었지, 그때
콧물 그렁그렁 달고 바라다본 집
등 돌린 엄마가 입술 깨물던 집


그 집 담벼락에, 목련 봉우리
금세 터질 것 같던


영문을 알고 피는 꽃도 있나 뭐
모든 애들은 영문도 모르고 자라나지
세월 지나 목련이 다 지게 되면
나 한나절에 무너지는 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울음 잦아들던 그 담벼락 아래로
찾아와 감싸 안던 엄마의 비린 치맛자락과
물 말아 먹던 고픈 저녁도 다 잊혀진 뒤에


벌건 햇살 아래 속 다 별려놓고
목련은 무너진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을
풀어본 다음에야, 그러니까


무르게 썩어가는 목련의 어른거리는 그늘로
다시 걸어가고 싶지 않다
눈이 시큰한 사람이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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