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식물의 인간성 - 김언

마루안 2016. 7. 10. 22:51



식물의 인간성 - 김언



나는 퉁명하고 이성적이고
인간이라곤 전혀 없는 병원에서
의사를 돕는 사람과
의사를 돕는 사람을 돕는 사람을
지망했다


다 모여서 환자는
아프다는 문장과 함께 있었다
가혹한 현실을 모르는 차트와 함께 있다고
복도에서 만난 가지런한 이빨 자국이 말했다
식물의 깊은 잠은 오 분이라고


오 분간 세월이 흘렀다
한 살 더 먹고 여름이 올 때까지


한번 들어간 목구멍은 길고
한번 들어간 목소리는 암담하다
장례식이 근처에 있다는 생각을
인간이라곤 전혀 없는 병원에서 누군가 했다
모르는 문병객들과 함께


그는 304호 누운 방에 있었다
한 살 더 먹고 여름이 길 때까지


추모할 줄 모르는 분위기가 열기를 더해갔다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 문학과지성








카운터 - 김언



긴 밤을 보내고 갈 건지 짧은 밤을 보내고 갈 건지
나한테 말해달라 내가 도와주겠다 너희들의 밤을


열쇠가 필요하다면 열쇠를 구멍이 필요하다면
훌륭한 구멍을 찾아서 보내주겠다 너희들은 신분을 속이고 찾아온다


모르는 사람은 부부로 말쑥한 신사는 자살자가 되어
찾아온다 어린 여고생들도 찾아온다 동반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그들이 신청하는 것


그들은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찾지 않는다
지옥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이름을 남긴다


내일 아침 한 명의 실종자가 버젓이 살아 나가더라도
놀라지 않는 표정으로 너희들을 맞아주리라 어서 오너라


네게 쥐여줄 수 있는 열쇠는 많다 되도록 고요한 방이면
더 좋다 바다가 보이는 창문이면 더욱 좋다


밤바다가 흐느끼는 소리 새벽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그거라도 느낀다면 나는 살아 있겠지 그것이 좋아


그것이 두려워서 보험을 들고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상속자의 미래는 너무 멀리서 절망하고 있다 생각이 너무 많으니까


너무 희박하니까 문을 열면 두 사람의 나체
한 사람의 시신 여러 사람의 약병이 나뒹굴고 있다


섞일 수 없는 몸은 없다 들어오는 순서가 다를 뿐
그들이 와서 미처 몸을 챙겨 가지 못했다


온갖 부스러기와 땀을 남기고 간다 목숨이 아니면
가장 가까운 탯줄을 끊고 간다 거기서 탄생하는 것이 무얼까


한 사람은 취했고 한 사람은 매일 새로운 열쇠를 건네준다
쉬었다 가라고





# 김언 시인은 1973년 부산 출생으로 1998년 <시와사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가 있다. 미당문학상,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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