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름다운 수작 - 배한봉

마루안 2016. 7. 10. 21:18



아름다운 수작 -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시집, 우포늪 왁새, 시와시학사

 







각인 - 배한봉



이름부터 아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장수풍뎅이, 각시붕어, 닭의장풀꽃
사는 법 알면 사랑하게 되는 줄 알았다
아이는 한 송이 풀꽃을 보고
갈길 잊고 앉아 예쁘네 너무 예뻐, 연발한다
이름 몰라도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눈빛만 빛나고 있다
사랑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임을
내게 가르쳐 주고 있다
헛것만 가득한 내게 봄을 열어주고 있다
깨닫느니, 느낌도 없이 이름부터 외우는 것은
아니다, 사랑 아니다
생각보다 먼저 마음이 가 닿는 사랑
놀람과 신비와 경이가 나를 막막하게 하는 사랑
아름다움에 빠져 온몸이 아프고
너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때
사랑은 웅숭 깊어 지는 것이다
이름도 사랑 속에 또렷이 새겨지는 것이다

 





# 배한봉 시인은 1962년 경남 함안 출생으로 1984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을 받아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98년 <현대시>에 신인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흑조黑鳥>, <우포늪 왁새>, <악기점>,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등이 있다. 배한봉 시인은 아버님과 함께 고향인 함안에서 감나무와 복숭아나무 과수원을 하고 있는 농사꾼 시인이자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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