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마루안 2016. 7. 4. 06:28



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 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 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뉘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뒤켠으로 사라진 것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네 내가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것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을 것이네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우표 한 장 붙여서 - 천양희

 


꽃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 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 출생으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한 원로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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