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굴비 - 오탁번

마루안 2016. 6. 1. 00:14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시집, 벙어리 장갑, 문학사상사







 

방아타령 - 오탁번



- 여보, 카섹스가 뭐래유?
요즘의 성풍속이 티브이에 방송되자
계집이 사내에게 물었다
- 병신, 자동차 안에서 방아 찧는 것도 몰러?
마당의 모깃불이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이튿날 사내는 계집을 경운기에 태우고
감자밭으로 감자 캐러 나갔다
산비둘기가 싱겁게 울고
암놈 등에 업힌 메뚜기는
뙤약볕이 따가워 뺨 부볐다


- 여보, 우리도 카섹스 한 번 해 봐유
- 뭐여?
-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
사내는 경운기를 냅다 몰았다
계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소쿠리 가득 감자를 캐면서
계집이 사내를 핼긋핼긋 할겨보았다
- 저, 병신!
사내는 욕을 하며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에
계집을 태웠다


- 아유, 아유, 나 죽네
솔개그늘 아래 경운기 위에서
계집은 숨이 넘어갔다
뻐꾹뻐꾹 울던 뻐꾸기가
울음을 딱 그쳤다






# 예전에는 詩란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가령,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는 말없이 고이 보내주겠다거나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싯구처럼 말이다. 그런 시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나이 먹으면서 시를 보는 눈도 많이 변한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시도 좋지만 좀 더 현실적인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가 더 눈에 들어오는데 오탁번 시인의 시가 바로 그런 시다. 외설스럽다는 생각보다는 인간의 본능을 여과없이 끄집어낸 절묘한 표현과 해학적인 싯구가 절로 미소짓게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고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