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환멸을 찾아서 5 - 유하

마루안 2016. 4. 10. 22:02



환멸을 찾아서 5 - 유하
-감각의 제국



오늘도 삶은 자꾸 막다른 곳으로 나를 이끈다
환멸이여, 그러나 막다르지 않는 내일이 어디 있을까
걸어온 길들은 돌아갈 틈도 주지 않은 채 모래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사라지는 것들의 배반 같은 눈물겨움,
그 눈물겨움 너머로 난 꿈의 앙상한 해골을 본다
살아온 만큼 난 더러워졌고 또 더러워져 갈 것이다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 버릇처럼 뒤돌아보면
추억의 무덤가엔 어린 날의 내가 울고 서 있다
날아가는 새와 영혼을 바꾸고 싶어
온종일 소나무 위 둥지만을 바라보던 그 아이
그 아이 생각을 하면 못 견디게 아프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하는 생각,
길들여진 앵무새처럼 노닥대다가 킥킥대다가
더듬이 하나로 지상의 모든 욕망을 욕망하는
감각의 벌레가 되어 스멀스멀 기어가고 있다는 생각,
그렇다고 삶이 나를 잘못 엎질렀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내가 삶을 잘못 읽었다
난 모범생이고 싶었지만 모범생이 되지 못했고
건달이고 싶었지만 끝내 건달이 되지도 못했다
썩은 시신 하나 남기기 위해 뒤척이는 것이 생이라면
한땐 세상이 어쩌지 못할 정도로, 광란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노래여, 이 지루한 나날들의 비늘 돋힌 건전 가요여
세월의 늪은 깊고 깊은 것이어서, 꿈들은
슬플 새도 없이 축축한 어둠 속으로 묻히고
나는 또 하릴없이 막다른 내일의 분홍빛과 거짓으로 타협하며
혼탁해져 갈 것이다 혼탁을 쥐어짜 고통을 만들 것이다
그 고통이, 막다름마저 막다른 생의 무덤 위에서
무심처럼 가벼운 새의 날개를 얻을 때까지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환멸을 찾아서 7 - 유하
-저문 강가에서


강은 온몸을 버리면서
그대로 온전히 강을 이룬다
버림과 얻음이 갈대의 무심한 휘어짐처럼
한 몸으로 만나는 그 곳에서
강은 비로소 은빛의 생애를 관통한다
누군가를 눈 시리게 그리워하며
탕진해 버린 세월
문득, 살아온 날의 상처가
돌이킬 수 없이 엎질러진 어둠처럼
허허롭게 만져질 때,
강은 어느새 저문 날의 끝에서
하늘의 목젖을 젖히며 새살인 듯 일어선다
증오는 그리움의 은비늘이 되어 주고
죽음이 생의 아가미에 깃들어,
막장으로 치달아도 마침내 처음인 강이여
오래오래 강만큼 흘러가 본 자만이
말할 수 있으리라
새의 날개 위에 드리워진 창공의 그물망을
멸절의 끝자리에 움튼
눈물 한 방울의 온기를




# 읽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유하 시인의 명시다. 언젠가부터 그의 시에 제대로 중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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