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누군가 살았다 - 박미란
한참 살다 가는 인연도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놓아버렸지만
그곳에 누군가 살았다는 흔적은
붉은 벽돌집 담벼락에 내걸린
빨래 몇 벌이다
나뭇잎이 구름을 스치고
물방울이 태양을 끌어안는 동안
바람은 또 어디로 갔느냐
한숨이 오고
한숨이 질 때까지
무심한 바람 물기 없는 설움
숨죽이며,
다시 숨죽이며,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갔다
한번 흔들린 자리는 예전의 자리가 아니다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문학의전당
이사 - 박미란
내년 봄에도
내후년 봄에도
목련나무는 꽃을 피울까
아파트 재개발이 가결되자 밤늦도록 막걸리 사발 돌아간다
늙은 나무가 한 잔 먼저 받아 마시고 숟가락에 구부러지는 노래 사이로 굵은 꽃송이 내다건다
언젠가 맞이할 마지막 봄이다
사람의 일 속에 꽃의 일생 막걸리 한 잔보다 쉽게 지워져도, 다시는 꽃으로 환생하지 못한다 해도,
저 꽃송이들 데려갈 수 없다
옷 보따리 꾸렸다 풀었다 하는 동안
목련이,
맨 먼저 다니러 왔다는 듯
사나흘 피고 잊히는 일이 가장 큰 이사라는 듯
잠깐 피었다가 흘쩍 떠나가고
짐승의 내장같이 어둡고 쓸쓸한 그림자만 밤새 너울거렸다
# 박미란 시인은 1964년 강원도 태백 황지 출생으로 계명대 간호학과 동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등단한 지 20년 만에 나온 첫 시집이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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