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마루안 2016. 2. 28. 21:26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박정대 시집, 단편들, 세계사







 

추억도 없는 길 - 박정대

 
 
하늘은 신문의 사설처럼 어두워져 갔다
주점의 눈빛들이 빛나기 시작하고
구름은 저녁의 문턱에서 노을빛으로 취해갔다
바람은 한 떼의 행인들을 몰아 욕정의
문틈으로 쑤셔 넣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수한 욕망으로의 이동이라고 그날 저녁의
이상한 공기가 나의 등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술을 마시고 청춘을 탕진해도
온통 갈망으로 빛나는 가슴의 비밀, 거리
거리마다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세월의 화석이 되어갔다 


그리고 세월은 막무가내로 나의 기억을 흔든다
검은 표지의 책, 나는 세월을 너무 오래
들고 다녔다 여행자의 가방은 이제 너무 낡아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흠칫 놀라곤 하지만
세월에 점령당한 나의 기억을 찾으러
둥그런 태양의 둘레를 빙빙 돌며 저녁의 나는
이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간판들은 화려하고도 허황하구나
기억의 처음에서 끝까지 아아, 나는
추억도 없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