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 김사인

마루안 2016. 2. 21. 22:33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 김사인
-고교 졸업 30주년

 
 

30년, 하는 제 소리에 놀라
그는 퍼득 꿈에서 깬다
교련복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
서둘러야 할 시간


웬 생시 같은 꿈!
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외선생으로 돌다가 군대 3년 푹 썩는 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박박 기는 꿈 돌아와 눈매 고운 여자 얻어 장가드는 꿈 그 여자와 집 장만하는 꿈 그 여자와 자식 낳는 꿈 아이 자라는 꿈 그 아이 대학생 되도록 애 끓이며 지켜보는 꿈 직장생활 여의치 않은 꿈 뒤늦게 승진하는 꿈 주식으로 한몫 잡는 꿈 다시 꼬라박는 꿈 피신하는 꿈 외로워 우는 꿈 부모님 편찮은 꿈 한 분 먼저 가시는 꿈 남은 분 모시는 일로 집안 뒤집히는 꿈 그러나 아이 때문에 차마 갈라는 못 서는 꿈 집 넓히는 꿈 승용차 커지는 꿈 접대에 골프에 허덕이는 꿈 어느 날 명예퇴직도 하는 꿈 그러다 그러다 아내 먼저 먼 길 떠나기도 하는 꿈 처자식 뒤로 하고 가기도 하는 꿈 졸업 30주년 안내장 받는 꿈 '무슨 내라는 돈이 이렇게 많대요' 마누리 잔소리를 한쪽으로 들으면서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마음 아득해지는 꿈


30년, 하고 중얼거리며 차가운 거울 앞에 서면
헐거워진 머리칼 너머 주름살 너머 먼 저곳
수1의 정석과 정통종합영어를 우겨넣은 가방을 끼고
발갛게 상기된 까까머리 앳된 그가 달려간다


30년, 하고 다시 가만히 말해보면
명치끝 어디선가 화아한 박하냄새가 올라오는 듯하다
삭은 젓국 냄새도 도는 듯하다
궂은 저녁의 쓰디쓴 소주 한 잔과 뉘우침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마른 고춧대 태우는 냄새가 도는 듯하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고 교실로 뛰어가는
거울 속 까까머리
그의 새벽 꿈자리가
기뻤는지 슬펐는지
알 길은 없다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코스모스 -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졸업식이 한창인 며칠 전 이 시를 다시 읽다 30년이 훌쩍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딱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어도 막연한 희망이 내 가슴 속에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등골이 휘는 열악한 노동, 하늘이 무너지는 바닥으로의 추락,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그냥 영원히 바닥에서 잠들고 싶은 유혹,, 그러나 살아남았다. 막연한 희망은 말 그대로 막연한 희망사항에 그쳤고 30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는 보장도 없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人命은 在天이라는 운명에 달려 있으니까. 운 좋게 30년을 더해 평균 수명을 채운다 해도 앞으로의 30년도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행복해지지도 말거라. 꽃같던 나의 화양연화는 30년 전 그 시절이었으니까.